사랑은 감정보다 태도

: 19. 나는 너의 뮤즈가 아니다

by 황 영


그와 사귄 지 2년이 훌쩍 지난, 내가 4학년을 앞둔 해였다. 그는 영화학교에 다니며 '그의 세계'를, 나는 학생회에 남아 '나의 세계'를 다지고 있었다. 그가 빠진 영어 연극제 총감독은 운용 선배가 맡았고, 나는 조감독이 되었다. 그의 빈자리는 상상 이상으로 허전했지만, 동시에 그의 그림자가 아닌 나의 힘만으로 무대를 완성해내고 싶은 오기가 생겼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달라던 그의 말에 나는 성장으로 답하고 싶었다. 나는 준비 기간 내내 그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 또한 내 의도를 알아챈 듯 조용히 지켜봐 주었다. 연극이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을 때, 그는 '내가 연출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며 운용 선배와 나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의 물리적인 도움은 없었지만, '그'라는 존재 자체가 나를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음을 깨달았다.


그 또한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영화학교 동료들과 찍은 단편 영화로 작은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정작 상을 받은 그는 담담했지만, 오히려 내가 더 기뻐 날뛰었다. '나의 뮤즈'라는 글자를 발견했을 때의 그 열광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단순히 주인공 이름이 내 이름이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그의 세계에서 인정받고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자, 우리 사랑에 대한 불안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우리의 사랑이, 그리고 그가 걸어가는 이 '올바른 삶'이 진짜임을 증명받은 기분이었다.


행복이 깨지면 안 된다는 불안감은,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가 베풀어준 다정함과 배려로 조금씩 녹아내렸다. 사소한 문제로 다툴지라도 그는 내가 과거에 겪었던 저속한 모습을 결코 보이지 않았다. 싸우는 문제에 관해 그는 논리적이고 현실적으로 접근했고, 설득하는 과정에서도 연인 사이에서 지켜야 할 예의를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싸움 끝에는 늘 나에 대한 사랑이 변치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는 그의 행동과 눈빛이 있었다. 따뜻한 포옹, 뜨거운 그의 눈빛, 그리고 그 이후의 더 뜨거운 사랑의 행위는 우리만의 변치 않을 사랑 공식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감정에만 치우쳐서 행동하곤 했던 내게 그는 그 감정을 한발 짝 떨어져서 바라보게 하는 여유를 가르쳐 주었다. 그는 우리 사이의 갈등과 마찰조차 논리와 예의로 다루었다. 물론 논리적인 그가 늘 옳은 것도 아니었고, 때론 우리의 관계를 너무 논리적으로만 따지려는 그가 다 맘에 드는 것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 때마다, 지쳐하지 않고 진솔한 대화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전달하려 노력하는 그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와의 사랑을 통해, 사랑이란 감정보다는 태도가 우선한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길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논리와 이성을 존경했지만, 사랑은 논리가 아니라고 믿었다. 나는 그가 논리를 넘어, 비논리적인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순수하고 장난기 넘치게, 그가 결코 이길 수 없는 시험을 시작했다. 진라면을 먹고 싶다는 그의 선택을 일부러 무시하고 내가 좋아하는 오징어 짬뽕라면을 끓여 내밀었다. 그는 울화가 폭발할 것 같은 표정으로 '안 먹어!'라고 저항했지만, 나의 포옹과 키스 한 번에 오징어 짬뽕라면에서 진라면 맛이 난다고 항복했다. 한동안 일부러 내가 좋아하는 쿨의 '아로하'를 하루 종일 틀어놓고, '어둔 불빛 아래 촛불 하나'라는 노랫말을 그의 귀 가까이에 대고 불러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를 완전히 밀어내지 못하고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의 논리가 나의 사랑 앞에서 무너지는 그 순간을 즐겼다. 그가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확신을 만끽하는 순간이었다.


그가 완벽한 사람이기에 그를 존경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또한 흠결이 많은 평범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그는 양치를 하루에 한 번밖에 하지 않았다. 가끔 그와 키스를 할 때,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입냄새가 그리 싫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와 결함 없는 키스를 나누고 싶었다. 나중에는 큰맘 먹고 그에게, 나와 키스를 하고 싶을 때는 반드시 양치를 하고 오라고 그에게 명령하기도 했다. 그는 귀여웠다. 하루에 10번은 넘게 양치를 하는 모습에, 그리고 마트에 가서 치약을 10개 이상 사다 놓은 그의 철저한 준비성에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고, 그만큼 그를 사랑하는 마음은 더 커져갔다. 나와 사랑을 나누기 전에 조차도 그는 샤워를 3분 정도에 끝내는 놀라운 민첩함을 보였다. 처음에는 그 속도에 경이를 표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찝찝함은 그를 마음 놓고 사랑해 주려 할 때 작은 걸림돌이 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나는 또 그에게 명령했다. 적어도 30분 이상, 구석구석 깨끗이 씻길 바란다고. 그는 군말 없이 딱 30분 정도를 씻었고, 다 씻은 후에는 나에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세히 검사를 해달라고 졸라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는 그를 세세히 검사하며 사랑했다. 그는 날 그렇게 만들 줄 아는 남자였다.


나는 현명하게 선을 지킬 줄 아는 여자였다. 그가 책을 읽거나 시나리오를 쓸 때 나는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만의 세계에 몰입한 그는 신성한 후광이 그의 주변을 감싸는 듯 보였다. 나는 그럴 때마다 조용히 책을 읽어 그와 리듬을 맞추었고, 몰래몰래 그가 몰입하는 순간을 바라보는 진한 행복을 누렸다. 그는 간혹 우울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생각에 깊게 잠기는 그의 모습은 늘 슬퍼 보이거나, 침울해 보였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는 나만의 확실한 해결책을 찾아내었다. 그냥 그에게 다가가 말없이 그를 안아주는 일이었다. 그는 늘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 품에 꼭 안겼다. 나는 그의 등을, 그의 머리를 쓰다듬기만 했다. 간혹 그는 그럴 때마다 엉뚱한 말을 하곤 했다.


"사랑해."


그는 사랑해라는 말을 아꼈다. 우리가 뜨거운 사랑을 나눌 때조차, 그는 그 말 대신 행동으로 증명했다. 하지만 내가 말없이 그를 안아주는, 그의 우울을 존중하는 가장 현명한 순간에만, 나에게 '사랑해'라고 말했다. 이전에 나를 그토록 괴롭혔던, 이 행복이 깨질까 봐 두려웠던 불안은, 그의 가장 무거운 '사랑해'라는 한마디에 눈 녹듯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사귄 지 2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서로에게 씌었던 사랑의 콩깍지가 벗겨진다고, 다들 말했다. 오히려 나는 그 사랑의 콩깍지가 더 강하게 자리 잡은 것 같았다. 어제보다 오늘, 더 많이 그를 사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사랑의 경이로움을 느끼며 원 없이 행복해했다. 그의 아버님이 갑자기 쓰러지시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