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탱크가 휩쓸고 간 돌고개 사거리는 겉보기에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군데군데 이빨이 빠진 것처럼 깨진 아스팔트 위로 다시 버스가 다녔고, 양동시장으로 향하는 할머니들의 잰걸음도 돌아왔다. 하지만 관측소 의자에 앉아 지켜본 세상은 어딘가 고장 나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증발했고, 사거리의 공기는 예전보다 훨씬 무겁고 축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미용실 안의 풍경은 더 기묘했다. 손님들의 머리 위로 분홍색 구르프가 말려 올라갈 때마다, 파마약 냄새에 섞인 소문들이 유령처럼 어지럽게 떠다녔다.
“전남대 학생들이 군인들한테 그렇게 맞았다매? 세상에, 사람이 죽었다는 말도 있대.”
“에이 설마. 아무리 군인이라도 같은 나라 사람을 어째 죽여? 유언비어겄지.”
믿지 못하겠다는 이모들의 말 끝엔 늘 불안한 한숨이 매달렸다. 가위질하던 엄마의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돋아났다. 엄마는 며칠째 전남대 앞 삼촌의 하숙집에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운용이 삼촌이 며칠째 들어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에게 삼촌은 단순한 동생 그 이상, 삶의 유일한 자부심이자 생명줄이었다. 해남에서 부모님을 여의고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무작정 광주로 올라왔을 때, 엄마의 손에 쥐어진 것은 서툰 미용 기술 하나뿐이었다. 엄마는 밤낮없이 남의 머리카락을 쓸어 담으며 삼촌을 뒷바라지했다. 아빠는 내가 태어난 직후 군대에 입대했다가 알 수 없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 미용실은 그때 받은 목숨값으로 세운 우리 가족의 마지막 요새였다. 가게 문을 처음 열던 날, 엄마는 아빠 사진 앞에 나를 꿇려 앉히고 절을 시켰다.
"영준아, 아부지한테 고맙다고 정성을 다해 절해라."
그날 엄마의 젖은 목소리를 나는 기억한다. 삼촌은 그런 누나의 고생을 알기에 서울의 명문대를 마다하고 전남대 법대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들어간 수재였다.
나는 구석 책상 위에 놓인 새총을 만지작거렸다. 삼촌이 구르프와 노란 고무줄을 엮어 만들어준 것이었다.
“영준아, 절대로 살아있는 생물한테는 쏘지 마라. 알았냐?”
엄포를 놓으면서도 평상 위에 군인 장난감을 세워두고 사격 대회를 열어주던 삼촌. 내가 이기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내 표정을 살피며 짐짓 분한 척 져주던 그 선한 눈매가 자꾸만 아른거렸다. 엄마는 쓸데없는 걸 가르친다며 핀잔을 주면서도, 돌아가는 삼촌의 손에 몰래 버스비와 용돈을 쥐여주곤 했다. 정류장에서 삼촌이 탄 버스가 멀어질 때까지 지켜보며 언젠가 다 같이 살기를 바랐는데, 그런 삼촌이 지금 소식이 없는 것이다.
손님이 다 가고 난 뒤, 엄마는 홀로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켰다.
“영준아, 인제 세상천지에 우리 셋뿐인디... 삼촌한테 뭔 일 있으면 엄마 못 살아잉.”
엄마의 젖은 목소리가 미용실 천장을 낮게 맴돌던 그때였다. 넝마주이 이 씨 아저씨가 사거리의 긴 그림자를 밟으며 나타났다. 커다란 넝마 자루를 메고 해진 밀짚모자를 쓴 그는 내가 본 어른 중 가장 단단해 보였다. 우락부락한 팔뚝에는 훈장 같은 잔상처가 가득했다. 예전에 빈 병을 서로 가지겠다고 넝마주이 몇 명 사이에서 싸움이 났을 때, 이들을 딱지 치듯 번쩍 들어 내팽개치던 그의 괴력을 목격한 뒤로 나는 그가 보일 때마다 미용실 안으로 숨어버렸다.
아저씨가 미용실 문 앞까지 다다르자 나는 새총을 고쳐 쥐고 엄마 뒤에 숨었다. 그는 흙먼지 묻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어수룩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저... 사장님... 머리, 머리카락... 쪼금만...”
가발 공장에 팔아 끼니를 때우려는 그에게 엄마는 바닥의 머리카락을 정성껏 싸서 건넸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닮았다며 늘 넉넉히 베푸는 엄마였다. 아저씨는 앞니 하나가 없는 입으로 어눌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덕림산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붉은 노을 속으로 스며드는 그의 뒷모습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한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때, 정적을 깨고 미용실의 전화기가 비명처럼 울렸다. 엄마는 심호흡 끝에 수화기를 잡아 귓가에 가져다 댔다.
“누나, 나야. 운용이.”
“아이고, 하나님! 너는 도대체 뭐 하는 놈이여? 누나한테 왜 이제야...!”
엄마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래, 알았으니까 몸조심하고! 딴 데 가지 말고 바로 미용실로 와. 누나 안 자고 기다릴랑게. 알았지?”
전화를 끊은 엄마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번졌다. 그날 밤, 엄마는 잠든 내 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도 엄마의 기도를 자장가 삼아 따라 읊조리다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밖에서는 간혹 콩을 볶는듯한 총소리가 들렸고, 그 이후에는 알 수 없는 무거운 소음이 밤의 정막을 긁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