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교시 <행복> 두 번째 이야기
6시간 연강 후에 이어진 A학생과의 대화는 체력적으로 쉽지 않았다. KO 당하기 일보 직전의 복싱선수는 라운드 끝을 알리는 '공'(gong *반백살이 다 되어가는 영어선생인데 '공'이 영어인 줄 지금 알았다.)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기도 한다. 다음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bell)'이 울렸을 때 A학생은 마지못해 돌아갔고, 난 그제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체력을 밥심으로 극복한 후, A학생과 나눈 짧은 대화에 대한 생각이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계속됐다. 피곤하고 괴로운 일은 아니었다. 이는 분명 즐거운 사유였다.
나는 '철학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고, A학생은 '왜요'라는 짧은 질문을 던졌다. 그 상황에서 '왜(why)'라는 질문은 폭이 너무 넓다. 첫째, A학생 입장에서 선생님이 왜 저런 대답을 하는지 그 이유를 물은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왜 그런 말을 하세요?) 만약에 이 질문이 맞다면, 나는 원인을 제공한 '철학은 배워서 어디에 써먹나요?'라는 너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라고 말해 주면 된다. 설마 A학생이 자기가 한 질문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나에게 왜 그런 말을 하냐며 물어봤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가능성은 철학이 왜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되냐라는 질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질문 또한 아리송하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보자.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철학이 무엇인지 논해야 하고, 행복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하며, 철학이 행복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도 언급해야 한다. 이 경우에는 행복이 '무엇(what)'인지에 대한 질문이 더 어울리고, 철학이 '어떻게(how)'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되는지를 물어보는 편이 더 정확한 질문이다.
다음에 A학생을 만나게 될 때,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 다시 물어봐야겠다. 그리고, 그전에 A학생의 질문에 대한 아쉬움도 분명히 일러주고 싶다. 질문을 만드는 능력, 즉 내가 무엇을 궁금해하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모르고, 알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질문 상정 능력은 삶을 살아가는데 필수이고, 바로 여기에 철학은 큰 도움이 된다. 철학의 영어, philosophy는 지혜에 대한 사랑에서 유래됐다. 철학의 한문, 哲學은 슬기롭게 알아가는 학문을 의미한다. 슬기롭다와 지혜롭다는 국어사전에서 동의어로 간주되며 이 단어의 정의는 사물과 현상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이를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 즉 이성적 사고능력이다. 사물과 현상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의 관점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이를 통해 내가 무엇을 알고 싶은지를 정확하게 알아낸 후에야 비로소 올바른 질문을 만들 수 있게 된다.
Ask someone well-chosen questions to look at their own views from another angle, and this might trigger fresh insights.
[2020년 11월 고2 전국 연합 모의고사 20번]
누군가에게 그들 자신의 관점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잘 선택된 질문을 하라. 그들은 새로운 통찰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즉 네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과 데카르트의 이성적 사고를 강조하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굳이 인용할 필요는 없다. 철학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베이컨, 헤겔, 칸트, 마르크스가 아니다. 이들은 철학을 했던 철학자다.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은 철학이지 철학자가 아니란 말이다. 대부분의 철학교육은 각 철학자들이 주장했던 난해한 사상만을 파고들고 나열하여 이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일찍 포기하게 만든다. 러셀의 두꺼운 <서양 철학사>를 쉽고 재밌어서, 밤잠 설쳐 가며 읽을 사람이 과연 지구 상에 존재할까?
철학은 난해한 말을 늘어놓는 학문이 아니라, 지혜로운 생각 그 자체다. 인간은 누구나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이해되지 않는 말은 과감하게 스킵해도 된다. 다만 칸트의 '정언명법'이 무슨 의미일까, 이것이 지금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라며 제대로 된 질문을 상정하는 것이 철학이다. 그래도 모르겠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것도 철학이니까.
다음 날, A학생이 기특하게도 먼저 나를 찾아왔다. 손에는 박카스와 초코파이가 들려 있었다. 무슨 의미일까? 피로를 회복하여 서로의 정(情)을 더 쌓아가자는 의미가 아닐까라는 다분히 문과적 생각을 하고 있을 때, A학생은 카페인과 포도당이 필요하실 것 같아서 가지고 왔다는 다분히 이과적인 말을 해주었다.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고 감탄하며 그럼 왜 하필 내가 좋아하는 캔커피와 초콜릿이 아니냐라고 (뭔가 그럴싸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물어봤지만, A학생은 집에 있는 거 그냥 가지고 왔다는 (그럴듯한) 대답을 했다. 초코파이를 한 입 베어 물며, 어제 한 질문의 문제점에 대해 A학생에게 말했다. A학생은 내 책상 위에 있는 티슈를 하나 꺼내 들어 책상 위에 떨어진 내 입에서 새어 나온 초코파이 가루를 닦으며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이 정말 궁금했던 것은 두 가지라고 말했다. 첫째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했고, 둘째는 철학이 어떻게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되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넌 정말 다 계획이 있구나!) 큰일 났다. 나도 행복이 뭔지 모른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나는 언제 행복함을 느끼나? 행복이 뭐길래? 어쩌지? 바로 이야기를 해 줄 수가 없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불현듯, (소크라) 테스 형님의 스킬이 떠올랐다. 받아라, 산파술이다!
너는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A학생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