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교시 <행복> 세 번째 이야기
A학생은 내가 초코파이 하나를 다 먹을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고민하는 A학생을 보며 내가 괜한 질문을 한 게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관계대명사가 뭐라고 생각하니'라고 A학생에게 물어봤다면, A학생은 '문장과 문장을 대명사를 통해 연결해 주는 접속사'라고 쉽게 답했을 것이다. 이 질문에는 확실하고도 명쾌한 답이 존재한다. 행복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정답은 없다. 지금 A학생은 아마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질문에 당황하며 어리둥절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어렵지? 행복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 안 해 봤구나. 그렇지?"
"그게 아니라, 머릿속에 맴돌긴 하는데 뭐라고 딱히 정의 내려서 말하기가 쉽지가 않아서요."
역시, A학생은 신중하다.
"그래, 당연히 그렇지.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생각이 철학이란다."
"이런 생각을 하면 삶에 도움이 되나요?"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는 건, 네가 행복해 지기 위해서가 아닐까? 불행하고 싶어서 행복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그건 확실하다."
"알겠습니다. 생각해 보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다 먹은 초코파이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으며, 일어서는 A학생에게 염치없지만 혹시 초코파이 한 개 더 있냐고 물어보자마자, A학생은 가방 속 따뜻한 초코파이를 꺼내 나에게 온정(溫情)을 베풀었다.
선생님이랑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돼서 좋아요.
자리를 떠나면서 던진 A학생의 말은 파이의 초코가 손가락에 녹아 질퍽해질 정도로 날 훈훈하게 만들었다. 보잘것없는 학원강사가 학생에게 이토록 손가락, 아니 가슴 덥히는 따뜻한 말을 들으니 감개무량했다. 나는 초코파이 두 개 먹을 자격이 충분한 놈이다.
철학은 이성적 사고를 통해 내가 모르는 지식과 지혜를 제대로 알 수 있게 해주는 올바른 질문 상정 능력을 가능케 한다. 질문이 생겼다면 답을 찾아야 한다. 질문에 답을 하는 일련의 과정은 대화를 통해 이뤄질 수 있다. 타인과의 대화건, 자기 자신과의 대화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검색을 통해, 책을 통해, 엄마를 통해 모르는 것을 물어 알아보는 과정이 대화다. 우리는 흔히 지식을 얻기 위해 검색엔진과 대화한다. 초코파이는 무엇인가를 입력하면 과할 정도의 엄청난 정보가 눈앞에 펼쳐지고 취향에 맞춰 그중에 하나를 골라 원하는 지식을 섭렵하면 된다. 하지만 초코파이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라는 질문을 입력했을 때 우리를 만족시킬 만한 답을 얻기는 쉽지 않다. 초코파이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라는 질문은 철학적 질문이며 보통 이런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철학은 이와 같은 '빅 퀘스천(big question)(큰 질문)'에 대한 답과 이로 인해 생기는 또 다른 궁금함의 연속이다. 즉 철학은 올바른 빅 퀘스천을 던지고 거기에 답하기 위해 이성적으로 행하는 모든 생각과 대화다. 초코파이가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를 생각하고 대화를 하다 보면 당연히 초코파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 수 있게 된다. 내가 누구인지를 탐구하는 일은 모든 철학의 근간이자, 인간이 그토록 바라는 행복한 삶의 근원이다.
이쯤 되면 철학이 대화라는 것을 몸소 증명한 한 사람이 떠오른다. 바로 소크라테스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 했다.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근원이 공기라 했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은 수로 이루어져있다고 했다. 앞의 문장을 형광펜 칠하면서 외워야 할 필요는 없다. 핵심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하늘과 그 너머에 있는 우주의 신비를 알아내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굳이 형광펜을 칠하고 싶다면 이 문장이다.) 소크라테스는 달랐다. 소크라테스는 만물의 근원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오로지 '인간의 삶'을 궁금해했고, '무엇(what)'이 아닌 '어떻게(how)'로 질문을 상정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을 알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일생을 노력했고, 이 문제를 풀기 위한 공식으로 '대화'를 대입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대화라 생각했고, 질문과 답이 오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고 믿었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의미 있는 대화 그 자체였다.
A학생과 나는 짧지만 의미 있는 철학적 대화를 나눴다. A학생은 공부만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을 쪼개가며, 행복의 정의를 궁금해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것이다. '궁금하다'의 영어 'wonder'의 어원은 '경이로움, 기적'이다. 수업시간에 'wonder woman'이 뭐냐고 학생들에게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B학생이 '궁금해하는 여자'라고 답해서 한동안 웃었던 기억이 있다. (하긴 원더 우먼 입장에서 슈퍼맨이 도대체 왜 타이즈 바깥에 팬티를 입었는지 몹시 궁금해했을지도 모른다.) 궁금함이 해소되는 순간, 우리는 깨달음을 얻는다. 깨달음은 모르는 것을 알았을 때 느끼는 기쁨, 즉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A학생은 행복의 정의를 생각해 보기 이전에 자신에게 행복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행복을 알아야 모두에게 적용되는 객관적인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무엇이었나,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행복함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앞으로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할 순간은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한다.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빅 퀘스천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철학이 확실하며, 그 답을 어렴풋이나마 찾아가고 있음을 느낄 때 우리는 '경이로움'을 느낀다. 철학이 주는 경이로움을 행복이라 말해도 전혀 틀림이 없다. 나는 A학생이 의미 있는 소중한 시간을 보내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A학생은 행복을 뭐라고 정의할까? 분명히 나한테도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겠지? 나는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생각에 사로잡혔지만, 본능은 지맘대로 움직였다. 껍질에 묻은 초코파이를 입으로 빨아가며 거의 다 먹어 갈 때쯤, B학생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며 내 옆을 지나갔다. B학생은 성적이 그리 높지 않지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나는 이를 확신한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봐 밝혀둔다.) 자기 주관이 강하고 매사에 긍정적이며 심리학을 전공하고 싶어 하는 학생이다. 나는 B학생에게 녹은 초코파이를 먹어봤냐고 물었고, B학생은 미소 띤 얼굴로 '그렇게까지 먹어야 하나요'라는 냉소적인 질문으로 대받았다. 불현듯, B학생에게 묻고 싶었다.
B야,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니?
아니다.
넌 언제 제일 행복하니?
B학생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선생님은 초코파이 먹을 때죠?
저는 게임할 때요.
그렇다. 이거다. B학생답게 시원시원하다. 역시 행복은 순간의 쾌락인가? 초코파이 묻은 혼잣말을 용케 들은 B학생은 '쾌락은 에피쿠로스죠' 라는 말을 던지며 유유히 사라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