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서 아빠는 너의 고뇌를 보았다 -<3>
어제 새벽, 그릇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견디고 견디다, 도저히 못 버텨 결국 먹을 것을 찾는 너의 배고픔이 내는 소리였다. 거실에서 자는 날 깨우지 않기 위해 나름 조심했을 널, 내가 안다. 안방에서 자고 있는 엄마가 그 소리를 안 들었으면 하고 순간 바랐다. 요즘 너만큼이나 민감한 엄마가 잠을 잘 못 자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안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못 들었는지, 아니면 나처럼 엄마도 모른 척해주었는지는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가스레인지 위에 물만 담아 놓은 냄비와 그 옆에 뜯지 않은 라면 한 봉지가 있는 걸 보았다. 딸아, 결국은 꾹 참고 버텼구나. 겨우 열여섯 된 아이가 어떻게 배고픔을 참았을까? 이건 아니다 싶어 그냥 돌아간 네가 참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론 착잡한 감정도 든다. 너에게 의지가 강한 어른의 (어른이라고 다 그렇지 않지만) 모습이 보여서다. 난 우리 딸에게 아이와 같은 모습만 보고 싶다. 배고프면 징징거리고, 배부르면 행복해하는 그런 모습을 많이, 자주 보고 싶다. 그렇지 못해서 슬프다. 끊이다 만 라면에서 아빠는 네가 아이돌이 되지 않아도 무슨 일이든 포기하지 않고 잘 해낼, 널 보았다.
오디션 준비하느라 힘들진 않니? 아빠는 너에게 관심이 없는 게 아니다. 다만 내가 혹시 쓸데없는 말을 꺼내어 너에게 원치 않은 스트레스를 줄까 봐 말을 아끼는 것이다. 또 오히려 네가 나에게 '아빠도 힘들지 않아?'라는 질문을 할까 봐서다. 아빠는 힘들지 않다. 힘들어도 다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은 사랑에서 나온다. 사랑, 그거 별거 아니다. 우리 가족은 내가 먹여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이다. 정말 버티기 힘들 때는 내 안에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구나,라고 생각한다. 너 어렸을 때 사진을 바라본다. 너 네 살 때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며 나에게 열심히 옹알거리며 설명하는 동영상도 본다. 힘이 난다. 눈물도 난다. 눈물을 비우고 그 자리에 사랑을 채운다. 충전이 끝났으니 이제 다시 툭툭 털고 힘차게 일어선다. 그렇다고 아빠를 불쌍하게 여기진 말아라. 세상의 모든 아빠가 그렇지 않을까? 오히려 나는 평균보다 못한 아빠다.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게끔 아빠가 풍족하게 벌어야 하는데 늘 모자라기만 한다. 딱히 돈 버는 쪽에 재능도 없는 것 같다. 난감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 이 삶이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좋은 날이 오겠지. 현재로선 이것이 아빠가 품을 수 있는 볼품없는 희망이다. 이거라도 없으면 못 산다.
오늘 송탄으로 수업하러 가다가, 우연히 '프리다 칼로' 전시회를 하고 있다는 배너를 봤다. 고흐에 아직도 빠져있다 보니 이제 화가들의 전시회가 눈에 들어온다.
내가 아는 프리다 칼로 또한 고흐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았고, 그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화가로 알고 있다. 잘은 몰라서 지금은 해 줄 말이 없다. 이번이 좋은 기회인 듯싶다. 짬을 내서 직접 전시회도 가볼 생각이다. 프리다 칼로 영화나 책이 있는지 검색도 해봐야겠다. 일주일에 수십 번은 지나가는 길인데, 왜 이제야 아빠 눈에 들어왔을까? 신기한 일이다. 이런 이벤트를 열어 줘서 나라에 참 고맙다. 대통령이 바뀌니 세상이 좋아지는 것인가? 갔다 와서 어땠는지 편지에 자세하게 써 놓겠다.
P.S. 오늘은 꽤 늦게 집에 들어갈 텐데, 가서 라면을 끓여 먹어야겠다. 다들 자고 있겠지? 시루만 깨어 있어 날 반기겠네. 엄마랑 너한테 미안하지 않게, 최대한 조용히, 냄새 안 나게 끓인 다음, 방에 들어가서 문 닫고 조용히 먹어야겠다. 시루한테는 개껌 하나 물려줘야지. 그러면 시루 방해 없이 먹을 수 있겠지. 하루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향긋한 냄새가 나는 옷으로 갈아입고, 좋아하는 영상 하나 틀어놓고, 온전히 라면 하나를 다 먹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행복하다. 사소한 것과 당연한 것에 고마움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내가 절대로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빠는 이 삶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