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하지만 무모하지 않은.
"여행 작가가 되고 싶으시다고요?"
진지하게 여행 작가가 되고 싶다는 사람을 만날 때 나도 모르게 되묻게 되는 경우가 있다. 반가움이 드는 동시에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막막함이 앞서기 때문인데, 여행 작가의 화려한 모습만 보고 달려드는 것 아닌지 걱정을 가장한 오지랖이 발동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책을 집필해 보고 싶다는 사람에게 '어서 오세요. 회사에서 당장 나와 어서 글을 쓰는 것부터 시작해 봅시다.' 이런 무책임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여행 작가가 '세상 낭만적인 직업'으로 부풀려져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자주 체감한다. 특히 여행과 동떨어진 직업군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게 되는 날이면 더욱 그런데, 민망하리만큼 여행 작가에 대한 부러움 섞인 찬가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여행 자주 다니시니까 정말 좋겠어요. 여행은 얼마나 다니세요?', '외국에서 글을 쓰시곤 하죠? 진짜 낭만적이에요.' 그때마다 나는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띠며, '네. 뭐 그렇지요.'(사실은 이런 대답조차 못 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얼버무리고 말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낭만적인 직업만은 아니랍니다.'라는 말을 백번은 되뇐다. 굳이 밖으로 그 말을 꺼내놓지 않는 이유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이 직업의 이면에 대해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데다가, 그들에게 여행작가에 대한 1그램의 환상이라도 남겨놓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에서다.
저 사람은 본인 직업에 뭐가 그다지도 불만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으리라 본다. 현실적인 이야기부터 꺼내보겠다. 불안정한 수입부터가 그렇다. 여행 작가가 돈을 버는 방법은 어떤 활동을 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프리랜서 세계가 다 그렇지만, 작가의 인지도나 능력에 따라 일거리가 넘쳐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일거리로 겨우 생활을 꾸려나가는 사람도 있다. 수입원은 출간한 책의 인세, 기사 원고료, 강의료 정도다. 베스트셀러가 아닌 이상 인세는 수입으로 잡기도 민망하다. 내 경우 수입은 대부분 강의와 여행 기사를 쓰고 받는 원고료다. 그마저도 잘 나가는 작가가 아닌 이상(나를 포함하여) 요청이 무작정 쏟아지지 않는다. 그러니 가끔은 편집자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열심히 준비한 강의가 인원 미달로 폐강되는 경우처럼 기운 빠지는 상황도 허다하다. 그래도 그럭저럭 먹고 살 정도는 되니까. 한숨 돌리는 순간, 그 수입은 다시 여행에 투자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 물론 협찬이나 원고료를 받아 진행하는 경우가 있지만, 취재 원고가 아닌 이상 콘텐츠 수집을 위해서는 본인 자금을 어느 정도 투자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본업을 따로 갖고 있는 여행 작가도 꽤 된다.
순수하게 여행을 즐기고 싶은 마음과 여행 작가의 의무감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다. 마음 가는 대로 여행한다면 힐링은 될지 몰라도 책 콘텐츠로 활용하기는 힘들 수 있다. 여행하는 내내 즐기고는 있지만 글감을 가져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마음을 짓누른다. 하기 싫은 일도 간혹 해야 하는데, 이를테면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도 한 번쯤은 먹어봐야 하고 내키지 않지만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여행지에서 보낸 시간은 대부분 행복했지만, 여행 작가가 된 이후로 안심한 적은 없다.
여행 작가가 되어 책을 출간하고, 이런저런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수백 명의 사람 앞에서 내 여행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런 순간을 상상하는가? 어느 날 훌쩍 떠나 지중해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노트에 글을 끄적이는 모습을 꿈꾸는가? 물론 여행 작가가 된다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다. 나 역시 이런 감격스러운 상황을 마주하곤 한다. 다만,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고고한 백조가 쉴 새 없이 물질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이면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여행을 미친 듯이 좋아한다는 것을 제외하곤 지극히 평범했다. 직장은 소위 말하는 안정적인 곳이었다. 월급은 꼬박꼬박 나오고, 휴가도 원하면 쓸 수 있는 그런 곳. 전공을 살려 일할 수 있었고, 직장 동료들과 사이도 좋았다. 겉으로 보면 아무 문제없는 평화로운 일상이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오랜 기간 골몰해 있었다. 조금씩 블랙홀에 빠져들어서 나중에는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두려워했다. 결정적으로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것은 어느 날 오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서다. ' 10년 후에도 이 칸막이 쳐진 좁은 책상 앞에 앉아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고, 지루한 보도 자료를 쓰는 일을 해야 한다고? 그건 정말 못 할 짓인데..' 가슴이 답답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루 만에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여행을 떠났다. 스르지 산에서 두브로브니크의 아름다운 마을 풍경을 보며, 내가 잘 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결론은 여행하며 글을 쓰고,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자는 것이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말처럼 '혼이 이쪽, 이쪽'이라고 내 길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 후로 곧바로 내 여행 경험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운 좋게 지금까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누군가 보면 바보 같은 결정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가치는 저마다 다르니 그런 의견에도 동의한다. 다만 나는 안정적인 생활보다는 정착하지 않는 조금은 위태로운 지금의 삶에 더 만족한다. 무엇보다 여행에서 마주치는 모든 순간이 사랑스럽다. 프라하에서 새벽 공기를 마시며 아무도 없는 카를교 위를 걸었을 때도, 몰타 바닷가의 한 카페에서 뜨거운 햇볕을 쬐며 내 얼굴만 한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던 순간도, 가격이 저렴하단 이유로 빌린 이탈리아의 한 지하 방에서 퀴퀴한 냄새를 맡으며 추위에 벌벌 떨며 원고를 쓸 때마저도.
반대로 적어도 일 년에 명품 가방 몇 개는 사야 하고, 아파트 장만을 위해 열심히 저축해야 하는 현실의 삶에 비중을 두고 있는 사람에게 여행 작가는 다소 버거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물론 생활과 여행 모두 커버할 수 있는 자금이 넉넉한 승자는 예외다)
이 모든 이야기를 첫머리에 꺼내는 이유는 여행 작가를 꿈꾸는 이가 있다면, 적어도 현실적인 부분을 알고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행 작가가 되고 싶다면, 그런 열정이 남아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시작은 여행책 한 권을 출간하는 것이다. 얼마나 간단한가. 물론 책을 쓰는 것은 녹록지 않은 작업이다. 수많은 사전 작업과 치열한 글쓰기 등등.. 이 모든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서 머리를 쥐어뜯어야 할 순간이 여러 번 온다. 다만, 높은 토익 점수와 몇 차례 면접을 거쳐 입사해야 하는 직업이나 전문 경력이 있어야만 진입이 가능한 다른 분야에 비하면 비교적 가진 것 없이도 시작할 수 있다.
게다가 여행책은 유려한 글솜씨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 오로지 신선한 글감, 즉 여행 경험만 있다면 그것을 써내기만 하면 된다. 딱 두 가지만 이야기하겠다. 책 한 권을 채울 정도의 분량의 글을 쓰겠다는 각오와 지금 당장 쓰기부터 시작하는 것. 이 글을 보고 있는 예비 여행작가가 있다면, 당장 예전의 여행 기록을 꺼내 써보는 것부터 시작해보라. 혼자 볼 수 있는 공간에 써보는 것도 좋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브런치 같은 매체에 써보는 것은 더 좋다. 꾸준한 글쓰기는 수업 중에도 내가 가장 많이 하는 잔소리이자, 이 시리즈에서도 지겹도록 이야기할 것 중 하나다.
현실적인 이야기로 시리즈를 시작한 탓에 마음이 가볍지는 않다. 1그램의 환상을 스스로 깨는 데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그럼에도 여행 작가를 꿈꾸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글을 적어봤다. 다음 편부터는 여행책을 쓰는데 필요한 실질적인 요건에 대해 다뤄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