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따져보자면요.
상반된 것의 조합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하얀 거짓말, 긍정의 배신, 필경사 바틀비의 모순 가득한 대답인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던가. 영화 <레이디 멕베스>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이유는 짙은 붉은색 소파 위에 서늘한 청색 드레스를 입은 캐서린의 모습 때문이기도 했다. 한겨울의 노천 온천도 빼놓을 수 없다.
여행과 작가도 그렇다. 여행 작가라는 하나의 직업명으로 묶여있기는 하나 뜯어놓고 보면 반대의 성향을 가졌다. 여행은 모험을 전제로 하며 미지의 장소에도 선뜻 갈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모르는 사람과의 만남도 기꺼이 즐긴다. 어떤 날에는 길을 잃어도 즐겁게 나름의 시련을 이겨내야 하고, 낯선 곳에서만 겪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라는 부제를 무기 삼아 고약한 향이 나는 음식도 호기롭게 삼킨다. 여행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겪어야 하는 일이다. 반면 작가는 다르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일이다. 글은 엉덩이로 쓴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듯이, 훌륭한 작품은 작가가 의자에 굳건히 앉아 영혼을 불태우며 쓴 결과물이다. 그야말로 정적인 직업의 본보기라 생각한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순전히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행 작가는 외향적인 사람에게 맞는 직업인가? 아니면 내향적인 사람에게 더 적합한 직업인가?
<퐁당 동유럽> 서문에 나는 나를 "조용하고, 소극적이고, 예민하고, 움직이기 싫어하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그야말로 내향적 기질의 완전체"라고 소개했다. 갓난아이일 때 잘 울지도 않아서 키우는데 품이 덜 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선천적인 내향형 인간이란 걸 확신했다. 학창 시절에는 물론 직장인이 되어서도 조용한 사람이라는 딱지는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거기에 딱히 불만은 없었지만, 한 가지 의아한 사실은 ‘그런 사람’이 ‘여행‘을 즐기는 것을 희귀한 생물을 발견한 마냥 놀라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거다. 장기 여행 선포를 할 때면 '네가 그런 용감하고 무모한 사람이었다고?'를 의미하는 표정과 말들이 쏟아진다. 심지어 매년 여행을 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여행과 모험은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것이 간혹 불만스러울 때도 있다. 그것은 질투 섞인 부러움이기도 하다. 외향적인 사람의 여행이 다이내믹한 경험이나 기회를 얻는데 빛을 발하는 경우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현지인과 금세 친구가 돼서 그의 집에 초대를 받거나, 새로운 여행지를 즉석에서 결정해서 떠나기도 한다. 여행이 낯선 것과의 조우라고 본다면, 이들의 여행 방식이 진정한 여행에 가깝기도 하다. 글을 쓸 때도 이런 경험은 영향을 준다. 그런 적극성으로 일어나는 일을 글로 쓸 때, 그 글은 반짝반짝 빛난다. 생생하고 자연스러운 경험은 에너지가 넘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내향적인 분들에게! 다들 알듯이 그렇다고 우리가 여행 가서 할 수 없는 것이 없지는 않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즐기면 된다. 나 역시 여행지에서 냉담하고 쓸쓸하게 있지만은 않는다. 비록 많은 사람과 함께 하는 투어는 질색하는 편이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유명한 관광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세계 각국 여행자와 교류하기 좋은 게스트하우스보다는 적당히 현지의 문화를 느낄 수 있으면서도 조용한 B&B를 선호하지만. 그것이 장점이 될 수도 있지 않는가? 그리스 이드라 섬은 한적하게 지내기에 최적화된 여행지였다. 그 작은 섬에 며칠간 머무르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여행임을 처음 알았다. 며칠 동안 한 것이라고는 아침마다 막 구운 빵을 사서 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아 지중해로 다이빙하는 관광객과 배를 모는 이드라 사람들의 모습을 눈에 담고 글로 적는 것뿐이었다. 내가 적는 글도, 전달하는 이야기도 모두 그런 것에 대한 이야기다. 정적인 여행 경험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특별함을 발견하게 해준다. 이를테면 같은 카페에 내내 머물며 맛있는 커피의 비법에 대해 생각해본다던지, 한 도시가 풍기는 향에 대해 알아차린다던지. 내향적인 사람들은 여행 후에도 소극적인 방식으로라도 '경험의 감정'을 나누기를 즐겨한다. 이런 점은 글을 쓰기에 유리한 성향이기도 하다. 말하고 싶은 것은 여행에서 특별한 경험을 하기 위해 억지로 본인의 성향을 바꿀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여행을 하다 보면 자신만의 여행 스타일을 발견할 수 있다. 외향적, 내향적인 것과는 관계없이.
분위기를 바꿔서 조금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앞서 이야기가 타고난 성향에 대한 자질이라면, 이번에는 노력에 대한 이야기다. '여행 작가가 되는데 필요한 것들'이라는 주제로 여러 이야기들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다. 슈퍼히어로에게나 요구될법한 다소 허구적인 이야기도 있다. 이를테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용기, 평범한 것에서 대단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날카로운 통찰력, 뛰어난 글쓰기 실력 등등. 모두 있으면 좋을 요소지만 내가 제안할 것은 실제로 여행하고 글을 쓰면서 노력해보면 좋을 법한 것에 대한 것이다.
체력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가. 또는 너무 시시한가. 그래서 소홀히 여기기 쉽기에 가장 강조하고 싶다. 나는 체력이 무척 약한 편이다. 단연코 내가 몸을 담고 있는 모든 집단에서 가장 약한 사람에 속했다. 20대 때는 젊음을 무기로 한 달, 두 달 여행이 거뜬했다. 우습게도 오래 여행을 할수록 여행을 하면서 체력이 길러진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산산이 조각난 것은 불과 1년 전이다. 시칠리아를 40일간 여행하는 일정이었다. 흙의 도시인 노토에 도착했을 때는 여행한 지 딱 보름이 되는 무렵이었고 나는 거기서 거의 반수면 상태에 빠졌다. 젤라토로 머리를 식혀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잤고, 2~3시간 정도 시내를 돌아보고 와선 다시 잠을 잤다. 이틀 내내 그랬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아파트 침실 한쪽을 장식한 화려한 초록색 꽃무늬 벽지뿐이다. 이 사건을 겪은 후 작지 않은 충격을 받는 나는 한국에 돌아와 체력 관리를 우선순위로 놓게 되었다.
호기심
타고난 호기심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행을 소재로 글을 쓰는 사람은 모든 것을 궁금하게 여겨야 하고, 탐구해야 한다. 호기심을 억지로라도 갖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무심함에서 드러난다. 무엇을 봐도 감흥이 없다. 여행지를 고를 때도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아닌 다른 사람이 좋다고 한 곳을 따라간다. 본인은 좋아하지 않는 나라이지만, 요즘 유행이라 글의 소재로 사용한다. 그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백 퍼센트 장담한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은 한두 편을 억지로 쓰다가 지쳐서 또는 지겨워져서 나가떨어지고 말 것이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감동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또 여행 작가 일을 오래 할 수 있다. 독자 역시 그런 글에 감동한다.
매일 글쓰기 습관
책 한 권 쓰기가 여행 작가의 시작이라고 앞서 이야기했다. 적어도 책 한 권 쓸 각오가 되어 있다면 소위 말하는 '글쓰기 근육'을 키우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평소에 글 한 편 쓰지 않는 사람이 대단한 열정을 갖고 있다고 해서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본인의 의지로 책을 써내려면 무던한 노력이 필요한데, 평소 글을 쓴다고 쓰는 나도 책 작업만큼은 고된 작업이다. 책 한 권은 긴 호흡의 글이다. 그전에 짧은 호흡의 글쓰기로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
외국어
'혼자 여행하려고 하는데, 영어를 잘 해야 하나요?' 강의를 하다 보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대상에 따라 내 대답은 달라진다. 단지 언어 하나로 두려움을 느껴 여행을 망설이는 분에겐 "영어 못해도 됩니다. 짧은 단어만으로도 다 통하게 되어 있어요. 학교 다닐 때 배웠던 영어가 순간적으로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언어 때문에 여행을 망설인다면, 겁내지 마시고 일단 떠나세요" 학생에게는 이렇게 답한다. "나중에 제대로 여행하고 싶다면, 영어 공부 지금부터 열심히 하세요." 외국어에 대한 답변은 이렇게 정리된다. 단순 여행이라면 영어를 굳이 능숙하게 잘 할 필요 없다. 간단한 영어 실력으로도 외국인 친구를 사귈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있는 여행을 하고 싶다면? 내가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 중 하나는 전 세계의 서점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내는 것이다. 그걸 실현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모든 서점을 탐방하는 것과 더불어 서점 주인과 영어로 능숙하게 인터뷰할 수 있어야 한다. 외국인과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건 어떤가? 서로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본인이 여행 목적에 따라 외국어의 필요 유무는 달라진다. 물론 외국어 말고도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괜찮다.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어주는 것, 악기 하나를 갖고 떠나 현지에서 버스킹을 하는 것. 소통은 언어로만 하는 건 아니니까.
철저한 작업 관리
혼자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요소이고, 여행 작가도 예외는 아니다. 여행 작가의 업무 영역은 꽤 넓다. 책을 쓰기 위한 취재에서부터 여행 준비, 기사 작성, 책이나 원고를 위한 편집자와의 소통, 강의, 매체 관리 등.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해내려면 철저한 계획 하에 모든 것을 관리해야 한다. 책 한 권을 출간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본다면 나 같은 경우 원고 작성 일정을 매우 세세하게 쪼개서 관리한다. 예컨대 초안은 몇 개월 안에는 털어버리겠다는 목표를 잡거나 진도가 나가지 않을 경우 하루 작성해야 할 원고 양까지 정해놓는 경우도 있다. 모든 것을 타이트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금세 흐트러지기 때문에 나중에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오기도 한다. 그렇기에 직장인 때보다 더욱더 시간 관리 신경을 써야 한다.
자질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타고난 재능에 대한 것은 거의 없다. 반대로 말하면 누구나 여행책을 쓰고 여행 작가에 도전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조금 겁이 난다면 딱 두 가지만 기억해라. 여행 경험에 대한 감정을 본인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고,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쓸 수 있는 끈기. 이 정도만 각오해도 충분하다. 어찌 됐든 게으르고 보통의 글을 쓰며 참을성 없는 나도 그럭저럭 여행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