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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리생각 Apr 20. 2019

뻔뻔함에 대하여

사람은 얼굴색으로 그 부끄러움을 드러낸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볼 때 왜 그리 시답잖은 일에도 얼굴이 홍당무가 됐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뜩이나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이라 조금이라도 부끄럽다고 여겨지는 경우에 처하게 되면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아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 같다. 나이를 들어가면서 이제 어지간해서는 얼굴색이 변하지 않는다. 당황스럽거나 부끄러움의 순간에도 포커페이스를 연출하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 한 거죽 마음의 갑옷을 덧입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내면의 양심은 부끄러움을 드러내도록 우리를 움직인다. 다만 그 드러내는 방식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화인 맞은 양심’은 양심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뻔뻔한 사람에게서 우리는 ‘화인 맞은 양심’을 발견하게 된다. 자기 방어기제가 양심의 작동을 멈추게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뻔뻔하다’를 국어사전에서는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염치없이 태연하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먼저는 자신의 행위가 부끄러운 짓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위안부나 강제징용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군국주의 후예들의 모습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그 시대에 부역했던 친일파들의 후예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그 시절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자기 합리화로 '염치없이 태연하다'. 심지어는 사실관계를 자신의 관점에서 왜곡하여 기억한다. 80년 광주의 책임자들은 고장난 라디오처럼 자신들의 왜곡된 기억을 되풀이한다. 그나마 기억이 안 난다고 하는 사람은 조금은 나은 편이라고나 할까? 뻔뻔함의 크기는 권력의 크기에 비례한다. 어떤 정치인은 자격미달의 자녀를 청탁으로 취업시켜 놓고도 실력으로 들어갔다며 ‘야당탄압’이라고 강변한다. 부끄러움은 얼굴의 두꺼움을 이기지 못한다. 이쯤 되면 부끄러움을 아는 것도 능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염치(廉恥)의 '廉'은 '살펴보다'는 뜻이고 '恥'는 '부끄러움'을 의미한다. 한자어를 풀어보면 '염치'는 부끄러움이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사람은 귀가 벌게지면서 부끄러움을 나타낸다. 그래서 '恥'는 부끄러운 마음을 귀로 드러낸다고 조어된 말이다. 부끄러움을 알고 그것을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 하겠다. 


염치에서 파생된 말에 '얌체'가 있다. 얌체는 국어사전에 '얌치가 없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얌치는 '염치'가 변이 되어 쓰이는 말로 염치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얌체는 우리네의 삶 속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뻔뻔함이다. 우리는 얌체를 보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경우가 예반사이다.  "얌체짓도 한두 번이지"라는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두 번은 애교로 봐준다.  또 누구나 한두 번은 얌체짓을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반복되는 얌체짓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또 얌체짓을 당하지 않으려면 한 발자국 멀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어에는 'Fair-weather friend'라는 말이 있다. 한마디로 염치없는 친구, '얌생이'다. 진정한 친구는 어느 회사의 광고 카피처럼 '어려울 때 도움이 되는 친구'다. 거기까지는 안 가더라도 '염치를 아는 친구'를 주변에 두고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라 할 것이다.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는 것이다.


비즈니스는 가치의 '등가교환'을 전제로 한다.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이 이익을 보고 어느 한쪽이 손해를 보는 '부등가 교환'은 지속되기 어렵다. 이는 '노동과 자본의 교환'에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는 계급 혁명론은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사회가 공리주의의 주장처럼 많은 사람의 이익(행복)을 향해 자기 조정을 통해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이익을 최대한 추구할 때 그 총계로서 사회 전체의 공리가 최대화된다는 철학은 자본주의 질서 구축의 토대가 되었지만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가의 뻔뻔함은 제국주의를 너머 세계대전으로 이어져 사회 전체의 공리를 완전히 파괴했던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지금은 자본가에 맞서는 노동의 뻔뻔함도 만만치 않다. 오래가는 경영, 지속 가능한 경영은 '등가교환'을 바탕으로 가능함을 인식하고 경영현장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는 불균형의 요소들을 들여보아야 할 때다. 다른 사람의 희생을 레버리지 하는 뻔뻔함도 내려놓아야 한다.


혹자는 '뻔뻔함도 경쟁력'이라고 한다. 이기려면 '뻔뻔해져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뻔뻔함은 '자기 보호수단'이며 '생존을 위한 도구'라며 '자신감'에 기반한 '용기'로 미화한다. 심지어는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라고 역설한다. 승자의 역사관을 대변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뻔뻔함에 맞서는 용기'이다. 뻔뻔한 자들의 책략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용기, 그 두꺼운 가면 뒤에 숨은 민낯을 드러내는 모략이 요구된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이제는 염치를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회, 옳은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이야기, 뻔뻔함에 대해 통쾌한 펀치를 날리는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역사를 기대해 본다. 산업현장에서도 '윤리경영'의 토대 위에바로 선 기업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여기저기에서 발견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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