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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바름 Dec 20. 2023

소문의 시작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오랜만에 과거에 같이 근무했던 동료와 통화를 했다. 알아온 세월만큼 서로의 아이도 많이 성장해 있음을 놀라워하며 자연스럽게 자녀 학업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동료는 우리 딸이 공부를 무척 잘하는 걸로 알고 있다고 했다. 나는 지금껏 회사 동료 누구에게 우리 딸 성적을 말한 적이 없다. 주변 사람들이 지나가는 인사말로 "그 집 딸, 공부 잘하지?"라고 물어보더라도 열심히 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원하는 성적을 얻기가 쉽지 않아 힘들어한다. 정도의 대답만 한다. 그럼에도 주변 사람들이 우리 딸을 공부 잘하는 아이로 생각하는 이유가 가끔 궁금하기도 했다. 그저 "딸 공부 잘하지?"라는 말을 우리나라에서 "식사하셨어요?"같은 느낌의 인사말이라 생각하며 못한다는 것보다 듣기 좋은 말이라 생각하고 지나치곤 했다.


올해 초 직장 상사가 모친상을 당했다. 보통 사내 경조사가 생기면 직장 내 동료들과 시간을 맞춰 조문을 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장례가 연휴기간이었고 장소가 지방이었다. 여기저기 동료들과 연락해 봐도 방문 시간 맞추기가 어려웠다. 모친상 당한 상사가 우리 부부 둘 다 아는 분이었기에 결국 남편과 같이 가기로 했다. 지역을 찾다 보니 마침 장례식장 인근 바닷가에서 지역 축제를 하고 있었다. 이참에 딸아이도 같이 내려가 지역축제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오자 했다. 상갓집에 가니 아는 직원이 몇몇이 미리 와 있었고 우리는 다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딸아이를 자리에 잠시 두고 우리 부부는 조문을 했다. 자리로 돌아오니 딸아이가 영어 단어책을 보고 있었다. 다음날 영어학원 단어시험을 본다고 단어집을 챙겨 왔다며 할 게 없어서 보고 있었단다. 사실 우리 딸은 외출할 때 책을 들고 다닐 정도로 공부에 애착이 있지 않다. 그저 늘 공부하기 괴로워하는 평범한 아이인데 그날은 본인도 그 자리가 어색했는지 평소답지 않게 단어장을 꺼내놓고 보고 있었단다. 그런데 그 모습이 소문의 발단이었다. 우리 딸은 회사 직원들 사이에 장례식장에서도 책을 펴고 공부하는 아이로 소문이 났단다.


동료에게 상갓집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웃음이 터졌다. "푸하하하!! 그랬구나~ 아... 너무 웃긴다. 평소에는 책 챙겨 다니지도 않아~ 근데 그날은 자리가 어색해서 잠시 펼치고 있었던 거야. 상갓집 나서서는 신나게 놀기만 했어~" 내 말에 동료도 따라 웃는다.

사실 내 자식 공부 잘한다는 소리는 들어서 나쁘지 않다. 또 그렇게 잘하는 아이로 봐줘서 고맙기도 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가 없는 자리에서 동료들끼리 우리 딸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물론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니라 그저 지나가다 우연히 나눈 대화였을 거다. 대개 동료를 만나면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대화 소재에 어울리는 다른 사람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끌어오곤 한다.


지난달 오래 알고 지낸 동료들과 만남을 가졌다. 그중 한 명은 대학에 진학한 자녀가 있었다. 그런데 자녀가 진학한 대학이 어디인지 1년이 지나도록 말하지 않았다. 동료는 그날 1년 만에 자녀가 지방 모 대학에 다니고 있다고 입을 열었다. 학교 이름을 말하면 대게 사람들은 그쪽 지역에 연고가 있느냐, 연고도 없는데 왜 그 대학을 갔느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냐 등의 질문을 한단다. 그런 질문을 반복해서 듣기도 답하기도 싫다고 했다.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나는 남편에게 그 집 아이 이야기를 했다. 대학교 이름을 듣는 순간 평소 남 얘기 좋아하지 않는 남편 또한 남들과 다르지 않은 질문을 내게 했다. 나 또한 다른 집 아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려면 칭찬을 하는 게 좋다. 내 입에서 나간 잘못된 말이 소문이 되어 누군가는 회복하지 못할 상처를 받기도 한다. 누가 그랬다더라. 어디서 누가 뭘 하는 것을 봤다더라. 소문은 그럴듯한 인과관계를 만들고 여러 명의 입을 거치며 살이 붙는다. 눈덩이처럼 커지다가도 어느 순간 햇살에 녹는 눈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고 구전된 내용을 전달하는 이야기꾼이 인기 있는 직업이었단다. 아직도 먼 옛날 구전동화와 전래동화가 내려오는 걸 보면 인류의 이야기 사랑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사람들과 대화하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말의 중요함과 소문의 파급력을 알면서도 가끔 자극적인 남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낼 때가 있다. 내 이야기에 웃으면서 재미있어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은근히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한번 나온 말은 절대로 주워 담을 수 없음을 안다. 그러기에 요즘은 누군가에 대한 험담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더라도 입을 열지 않고 꾹 삼키려고 노력한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의 말 참는 노력은 어쩌면 수행의 일종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오늘도 남의 말을 함부로 하지 않기 위해 수행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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