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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탄 리 Jan 20. 2024

상투를 잃을 때만 해도 몰랐다. -2

소설

2
 노인이 된 내 삶은 비루했다. 나는 깡통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그저 그런 노인네. 길바닥에 떨어져 밟히고 밟히는 껌. 날 너머트린 사람들은 물결처럼 내 머리를 밟고 지나갔다. 나보다 못한 -집이 없는- 노인들도 있었지만, 난 아주 오래전 고인이 되신 임팔순 할머니의 명의로 된 공공 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어쩌다가 이 한 많이 맺힌 인생이 끊어지지 않고 여기까지 버려진 돌처럼 굴러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살지 못해 죽어갔고, 죽지 못해 살아왔다.
 50년 전, 내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제 어미를 닮아 눈이 초롱하고 이목구비가 트였으며, 나를 닮아 명량한 아이였는데, 그 아이는 인류의 대 환란 당시 실종되고 말았다. 아, 저주받은 손이여, 그 아이를 놓친 손이 저주스럽다. 나의 아내는 3년 전에 조상들의 나라로 먼저 떠났다. 그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로봇을 청소하며 사는 노동자였는데, 평생 개 같이 고생만 하다가 죽었다. 딸을 잃어버린 뒤, 간신히 이혼은 면했지만, 아내는 날 쳐다보지 않았고, 나도 감히 아내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녀는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내 곁에 남아 있는 듯했다. 나는 아내의 유골을 지금은 다 무너져 내린 아파트 철골 구조 더미 속의 양지바른 곳에 넣어 두었다. 실개천이 아내의 유골함과 물풀을 휘감아 돌았고 개구리들이 그 주위를 뛰어다녔다. 살아생전 개구리 구이를 좋아하던 아내였는데, 아 생이여, 나는 왜 내버려 두었는가!
 내가 젊던 시절에는 국민의 90프로가 중산층이 되길 열망하였으나, 지금은 국민의 -국민이라 해 봐야 150만 언저리가 남았지만...- 99프로가 오히려 거지가 되기를 원했다. 피는 베트남인들, 중국인들, 일본인들과 뒤죽밖죽 섞여버려 한 민족이라는 말이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김이니 박이니 석이니 하는 성도 실은 무의미하게 되었다. 내가 젊던 시절에는 대한민국이 부강하고 잘 사는 나라였는데, 물론 그 당시에도 문제가 많았다. 지금의 한국은 국가가 유지되는 게 이상한? 그런 나라가 되어 있었다. 아, 그때도 그러했던가?
 물론 옛 광명이나 주절주절 늘어놓자고 이 글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시작하기 전에는 이유를 알았는데. 지금은, 도저히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노인성 치매인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무튼 전쟁과, 재해, 기근과, 시민들끼리의 테러로 인해 이 땅은 황폐해졌으며, 탱크 덮게나 아파트 철근이나, 잘려나간 벽돌의 일부러 집을 만드는 이 세상은 킨츄기를 떠올리게 했다. 왜 부러진 조각을 모아다가 새로운 도자기를 만드는 일본의 도자 공예 말이다. 아무튼 도시는, 무너지고 부서지고 쪼개지고 붙여지고 이어지고 새로이 만들어진 이 신도시는, 전래 없던 기괴한 모습이었다.
 북극의 얼음이 녹고 해수면이 올라 옛날엔 많은 뭍에 있던 건물들이 물아래로 가라앉았다. 물에 잠긴 흰 건물들의 머리가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동네 면읍 동리들이 많다.
 온갖 책으로 가득했던 내 방에는 이제 도스토예프스키의 책 딱 한 권만이 남았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그것마저도 아주 오래되었지만. 나머지는 불타거나 없어졌으며, 낡고 마모되어 쓸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해는 뜨고 지며, 달은 밤을 외로이 파수하고, 별들은 가끔씩 반짝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섹스를 하고 애를 낳고 낳은 아이들을 죽이기도 했다. 역사 이래 이러한 시대는 없었다.

 세상은 밝고 고요했으며, 풀로 가득 찼고 물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냄새나고 비루했으며, 배우지 못해 무지몽매했다. 거리에 나온 이들 중 젊은이는 없다. 황노인, 박노인, 최노인, 외국 성씨를 따른 무슨 노인 무슨 노인들만 남아, 황혼 아래 땅 위를 벌레처럼 기어 다니고 있었다.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소망할 수도 없었다. 인류는... 완전히 망했다. 노인들은 죽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죽음 가운데 삶이 있다고 수십만 겹으로 쌓아진 이 쓰레기의 산에서, 새로운 이상 국가를 만들자고 외치는 자들도 간혹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옛날에는 인류의 표적이 되었으나, 지금은 소리 없는 전단지가 되어버렸다. 아, 그들을 말은 하였지만 목소리가 없었고, 목소리는 있었지만 말이 죽었다. 나는 이들에게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옛날 음식들이 미친 듯이 먹고 싶었다. 떡볶이 순대며, 라면이며, 김치찌개, 부추전, 된장국, 고사리 무침이며, 철판 볶음밥, 간고등어 같은 지극히 서민적인 음식들. 하지만 지금은 농사를 짓지 않으니, 쌀이 희귀해졌고, 어업을 하지 않으니 물고기가 줄어들었으며, 축산업을 하지 않으니 고기가 없었다. 그런 것들은 부유한 자들의 대농원에서만 길러지고 사육되었다. 그들은 산 높은 곳에 그들만의 요새를 짓고, 노아처럼 모든 들짐승들을 끌어 올라간 뒤 방주의 문을 닫았다. 나머지는 그저 고아였다. 인간으로부터, 신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자들...
 나는 내 누데기 옷의 구리한 냄새를 맡으며 이 글을 적고 있다. 이제 슬슬 허기가 질 참이니 식량을 구하러 밖을 돌아다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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