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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탄 리 Jan 20. 2024

상투를 잃을 때만 해도 몰랐다 -3

소설

3
 하늘은 맑고 아슬하고 고요하고, 새소리 한 줄이 낙엽처럼 사선으로 길게 울렸다. 바람은 실바람, 바람은 물비린내를 주머니 속에 넣어 가지고 왔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발목이 물에 잠겼다.
 저 멀리에서 연기들이 피어났다. 구수한 냄새도 났다. 나는 그리로 비스듬하게 다가가 보았다. 웬 노인 셋이 깡통에 뭔가를 끓이고 있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난 그들을 피해 폐허로 일그러진 산을 오르고 올랐다. 구름들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하늘을 떠돌았다. 해는 말이 없었다. 언덕 위에, 오래된 아파트 터 옆에, 죽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나는 그걸 붙잡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꽤 높은 곳으로 올라왔는지, 폐가 찌릿찌릿했다.
 황혼이 지고 있었다. 물에 잠긴 세상이 붉고 검게 물들어지고 있었다. 쥐들은 풀밭을 찍찍거리며 기어 다녔고, 새들은 내가 잡고 서 있는 느티나무 우듬지에 올랐다. 오래전 여기서 이 아래를 내려다보면, 생기 넘치는 도시가 펼쳐졌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산을 내려오는 동안 땅거미가 져서 주위가 보이지 않았다. 전기공사가 없으니, 더 이상 가로등이 운행될 리가 없었다.
 산 중턱까지 내려오자 비가 떨어졌다. 나는 비를 피하려고 미루나무 아래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어둠과 비를 들여다봤다. 예전에 차들이 도로 위를 생생 지나다니던 소리가 생생했다. 그러나 지금은 빗소리와 적막만 존재할 뿐이었다. 한참을 나무 아래 쪼그려 있는데, 내 예민한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아이의 울음소리와 비슷했다. 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숲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웬 아이가 젖은 땅에 주져 앉아 울고 있었다. 아이는 팔이 하나 없었고, 다리에서는 어디에 찔렸는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모든 힘을 쥐어짜 내어 그 아이를 들어 품에 안았다. 아이의 정수리와 숨결에서는 따뜻한 젖냄새, 분유냄새가 났다. 이런 시대에 분유라니, 내가 헛것을 보고 맡고 있는 것인가.
 아무튼, 어디에 찔렸는지 다리에 난 상처가 얼마 되지 않아 보여, 풍이라도 예방하기 위해 그곳을 빨리 벗어났다.
 그러나, 병원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나는 그 아이를 묻어줘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 벌써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세상이 캄캄하고 비가 오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 물론 주변 지리는 훤히 익히고 있었지만, 문제는 여기저기 튀어나온 철근과 그 외의 잔해들이었다. 내가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아량은 그 아이를 얼른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죽음을 내 눈으로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다.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 뇌리를 파고들었다. 나는 내려오던 산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온 뼈마디가 저리고 시리기 시작했지만, 그런 것은 상관이 없었다. 나는 여러 군데 긁히고 쓸리며 다시 산을 올라갔다.
 퉁퉁퉁-
 나무문이 쇠고리와 더불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서 그곳에만은, 그곳에만은 빛이 있었다. 성벽은 두껍고 높았다. 안에선 웃고 떠드는 소리들이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했다. 나는 포기했다. 다시 빗소리와 적막이 고개 숙인 내 주위를 감쌌다. 터벅터벅 산길을 내려가다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내 품의 아이는 내동댕이 쳐졌다. 나는 신음을 내며 기어가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이는 거의 죽은 듯했다. 이제는 울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는 흙을 파서 아이를 묻어주었다. 그리고 달아나는 듯이 그곳을 벗어나 집으로 향했다. 새벽 4시쯤 집에 도착했다. 방바닥에 앉아서 빗물을 말리는 동안 잠들 수 없었다. 잠을 잘 생각도 없었다. 정신은 너무나도 또렷했다. 내 젖은 머리를 손으로 꼬으는 장난을 쳤다. 내 방에는 내가 평생 모은 라이터 수백 개가 있었다. 나는 그 불빛으로 간신히 몸을 덥혔다.
 울음이 나왔다. 갑자기 천둥이 쾅하고 떨어졌다. 빗소리가 굵어졌다. 나는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한참 동안을 그러고 앉아 있었다.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었다. 나는 내 손톱 밑살을 뜯어먹었다. 그래도 허기는 가시지 않았다. 혀에서 피맛이 느껴졌다. 그렇게 두어 시간쯤 흘렀나? 사위가 고요해졌다. 창문은 푸름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창을 열어 쇠창살 너머를 바라보았다. 해가 산 밑 골짜기로부터 붉은빛을 토하고 있었다. 해에 닿이는 모든 사물이 색을 입기 시작했다. 세상은 점차 밝아져 갔다. 나는 그 장엄한 풍경을 오랜 침묵으로 바라보았다. 저 산 위에 외딴 성체가,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내 마음은 상상할 수도 없이 복잡해졌다. 나는 새소리가 들릴 따까지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있었다. 새소리가 들려오자, 몸에 긴장이 풀렸고 기진하여 쓰러졌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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