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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탄 리 Jan 20. 2024

상투를 잃을 때만 해도 몰랐다 -4

소설

5

 일어나 보니, 다시 어둠이 눈을 감싸고 있었다. 온 삭신이 쑤셔왔다. 나는 통증을 잊으려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니, 긴장이 풀리어 잠시간은 평온해졌다. 해 뜨는 모습을 다시 지켜봤다는 것을 다시 묘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날이 밝자마자 난 밖으로 향했다. 기억과 감각을 더듬어 어딘가로 갔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를 묻어준 곳을 찾아낼 수 없었다. 거리의 노인들은 나를 정신 나간 이쯤으로 보았을 것이다.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나는 그날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대처의 아파트 잔해 위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은 깡통을 개구리나 쥐나 달팽이로 교환했다. 장이 열리는 곳엔 늘 검은 연기들이 피어올랐다. 멍하니, 아주 멍하니 그 모습들을 지켜보았다. 나보다 젊어 보이는 한 노인이 강아지 풀을 들고 나를 올려다봤다. 그의 눈빛은 맑고 투명했다. 그는 악의 없는 눈빛으로 날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강아지 풀을 흔들며 장터 쪽으로 헐레헐레 뛰어갔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 같아 보였다. 뭐, 정신이 성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마는...


 몇 시간이 흘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몇 번은 꾸벅꾸벅 졸기도 한 것 같다. 날 깨운 건, 한 여자노인이었다. 그는 내게 말린 개구리 한 점을 쥐어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슈?


 나는 그간의 사정을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그녀는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그 아이가 참 안 됐다는 듯이, 그러나 그만큼 자신도 비참하다는 듯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우리는 바위 위에 앉아 폐허가 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폐허 위로 황혼이 내려앉았다. 숲 쪽에서 꽹과리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잘못 들었거니 싶었다. 이 시대에 꽹과리라니. 나는 그 소리를 들었으면 하고 바란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세히 들어보니 그건 꽹과리가 아니라 양철통이었다. 어떤 노망 난 노인이 그걸 두드리나 궁금하여 숲 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여자 노인이 허리에 손을 얹고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가까이 다가가니 맵고 구수한 냄새도 나는 듯했다. 내 심장은 갑자기 배로 뛰기 시작했다. 향신료라니... 맡아본 적이 언제 적이었던가. 나와 여자노인은 힘을 내어 숲을 헤쳐나갔다. 숲 속에 웬 무리가 모여 있었다. 그들은 텐트를 쳐 놓았다. 거기에는 웬 박스들이 쌓여 있었다. 그들은 적의 있는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았다. 손에 다들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손에서 든 무언가에선 김이 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건 깡통이었다. 그들은 깡통에 담긴 무언가를 마시고 있었다. 그 냄새를 맡았을 때 내 온몸의 세포가 다시 깨어나는 듯했다. 나는 깜짝 놀라 왁 소리를 질렀고, 저녁을 먹으려던 새들은 놀라 숲을 달아났다.


-당신들... 그 먹는 것이 무엇이오?

 내가 검지를 피면서 먹었다.


-찌개라오. 김치...찌개...

 그들 중 하나가 내게 답했다.


-어디서 그런 걸 구했소? 이 세상에?


-저기 성 안에서... 훔.. 훔쳐왔소!


-도둑질이라니... 어떤 벌을 받으려고 그러시오?


적의에 찬 사람들은, 우리가 꼴랑 노인 둘이라는 걸 알아보고 안심하는 표정들이었다. 아니, 그들은 이제 떨고 있었다.


-성 안에, 그런 것들이 있단 말이오?


 나는 침이 줄줄 새는지도 모르고 말했다. 심장이 쿵쾅거렸고 등과 손끝에 식은땀이 맺혔다.


-맞소. 더 진귀한... 것들도... 많이 있소.


-용서해 주시오. 용서해 주시오. 우리가 훔쳤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 주시오.


 그들 중 하나가 떨면서 말했다. 아마 유명무실한 권력과 법을 무서워하는 순진한 사내들이 분명했다. 부자의 물건을 훔치면 먼지가 되는 형벌이 있었다. 저자들은 그 끔찍한 형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럼... 우리 두 사람에게... 그... 뭐라...그 궁물 (갑자기 국물이란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걸 좀 주시오!


나는 나와 여자노인을 번갈아 가리키며 소리치듯 말했다.

그들은 당장에 떨리는 손으로 국물을 퍼담아, 우리에게 대령했다.


 나와 여자 노인은 벌벌 떨면서 그걸 받았다.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침묵은 잠시. 우리는 허겁지겁 그 새빨간 국물과 건더기를 들이키기 시작했다. 까마귀가 울었다.

 나는 여자노인을 포함한 전부를 내버려 두고 숲에서 나왔다. 그때 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스름이 숲의 나무 사이로 고갤 내밀었다. 까마귀가 끊임없이 울었다. 


 '어떻게 담을 넘었지? 쥐구멍이 있나? 땅을 팠나?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한 거지...'


 그 새빨간 국물 속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아내가 떠올랐다. 그 새빨간 국물 속에서 그제저녁 피 흘리며 죽었던 아이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보았던 계양귀비 꽃이 떠올랐다. 내 앞에서 팔다리가 날아가던 군인들이 떠올랐다. 피와 기름이 엉긴 붉고 검은 바다가 떠올랐다. 내가 씹었던 두부와 고기 알맹이에서 사람들의 살맛이 느껴졌다. 나는 속의 모든 것을 올려내었다. 


-우웨에엑!


-우웨에엑!


까마귀가 울었다.


밤이 내 등을 짓눌렀다. 난 고개를 들었다. 달빛이 내렸다. 손에 잡히는 뾰족한 돌을 들었다. 라이터를 켰다. 어두웠던 시야가 약간 트였다. 그리고 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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