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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이 컴컴했다. 하늘엔 푸른 별들이 몇 점 보였다. 고장 난 비행기가 추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바다에 빠졌는지 터지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헥헥거리며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둔덕에서 잠시잠시 숨을 휘몰아 쉬었다. 바람이 찼다.
성의 불빛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음악소리가 먼 언덕 위에까지 울려 퍼졌다. 몇 번이나 폐허의 잔해에 다리가 긁혔는지 모르겠다. 아픔도, 고통도 잊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성 앞에 섰다. 성은 허리까지 15미터가 되는 거인의 가랑이처럼 보였다. 나는 겁에 질렸다. 지금이라도 달아날까 하는 생각은 없었다.
나는 성벽 둘레를 걸으며 성벽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나 없나... 성은 둘레만 해도 1km가 될 것이었으므로 충분히 구멍이 있을 것이었다. 라이터의 기름이 점점 휘발되었다. 내 마음은 초조해졌다.
얼마쯤 걸었을까? 다리의 저림이 확인되기 시작했다. 원래 있었으나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허리도 아팠고 입은 바싹 말랐다. 성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내 분노는 두 배로 활활 타올랐다. 나는 뾰족한 돌로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하단의 돌이 드러났다. 부엉이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돌을 빼어냈다. 돌을 빼어내고 빼어내고 또 빼어냈다. 바람이 울음을 울었다. 내 몸이 들어갈 만큼의 구멍이 생겼다. 냅다 머리를 집어넣었다. 빛이 보이지 않았다. 빛이. 머리를 빼고 다시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날이 점점 밝아왔다.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흙을 파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안 돼,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외치면서도 마음은 끊임없이 일을 충동질했다. 그러다가 맥이 풀리는 순간이 있었고, 나는 잠시 호흡을 멈췄다. 하늘이 허옇고 푸르렀다. 구름도 몇 점 있었다. 새들이 그 사이로 날개를 파닥이며 지나갔다.
나는 시선을 계속 먼 허공에 두었다. 그때, 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자빠졌다. 그러나 그림자는 자빠지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나를 물그러미 들여다보았다. 해가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바람이 우리 둘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그녀의 얼굴은 어딘지 낯이 익은 데가 있었다. 그녀는 싱긋, 물기에 젖은 상추처럼 웃더니, 따라오라고 말했다.
아, 그녀의 웃음은 슬펐다.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봤더라. 저 50대의 여성을 내가?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봤더라. 나는 한순간에 내 80 인생을 다 들여다보려 했다. 하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절망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여자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바구니를 안고 있었다.
성문 앞으로 다가간 그녀는 날 잠시 기다리라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고왔다. 나는 물그러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팔자주름을, 땀구멍을 작은 입술을, 오똑하지만 휘어진 코를, 둥그런 이마를, 힘이 깃든 커다란 쌍꺼풀의 눈을, 갈색의 눈동자, 온화한 눈썹을, 그리고 긴 고동색의 머리를.
아, 아, 아!
내 눈에선 물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미 성 안으로 사라지고 난 뒤이지만, 그래. 그래.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났다. 저 여인, 저 여인을!
삼십 분쯤 지났을까? 돌쩌귀가 소리를 냈고 큼직한 문이 열렸다.
그녀는 김이 나는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빛과 김에 의해 시야가 차단되어 난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코가 먼저 반응했다. 매운 땡초에, 구수한 된장에, 지글지글 끓는 소리에...
아, 그것은 된장찌개였다. 그녀는 된장국을 든 손을 내밀어 나보고 먹으라고 했다. 악의 없는 눈으로 웃으며. 나는 된장국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녀의 손과 내 손이 스쳤다. 그녀의 손은 작았다. 그녀는 손을 내빼더니, 약간 음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성급히 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떠한 미련도 망설임도 없이.
나는 황혼이 내리기까지 그 성문 옆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들풀이 채였고, 제비꽃이 걸렸다. 노란 오후의 햇살이 날 쓰다듬었다. 그때까지도 국을 먹지 않았다. 국에는 벌써 파리가 붙었다. 나는 멍하니 황금빛 구름과 된장 국물을 번갈아 들여다보았다. 국물 속에서 아까 그 여인의 형상이 춤을 추듯 일어났다. 서서히, 아주 조심히, 국그릇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찬찬히, 아주 느리게, 비스듬히 기울인 국그릇에 혀를 가져다 대었다. 진한 국물은 혀를 타고 내려와 내 목젖을 적셨다. 혀에 아주 향긋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나는 꿀꺽 그것을 삼켰다. 그리고 맛을 음미해 보였다. 죽은 아내의 맛이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