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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탄 리 Feb 13. 2024

그날 영일대

해가 질 때
모든 것의 숨이 멎을 때
그 전조로 포스코의 공장 굴뚝, 공장 벽면에는
붉은 해가 번쩍거렸다
파도는 조용했고
해안선을 씻을듯이 밀물은 밀려와
모래밭에 낮게 찰랑거렸다
수평선 위로 낮게 퍼진 구름과 해무는
보랏빛과 붉은빛으로 뒤섞였다
구름과 해무는 그 멍과 피를 손에서
옥빛 바닷물에 물 따르듯이 풀어놓았다
갈매기들이 인간의 손길을 따라
새우깡 하나에 이쪽으로 또 저쪽으로-
파도는 갈매기 떼의 발을 적셨다
밤이 내리자 바다는 청록빛으로 반짝였다
이윽고 포스코 굴뚝과 해안을 두르고 선 상가들에 든
불빛이 바다에 노란 닻을 내렸고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사륜 자전거 바퀴를 굴렸다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 서있었지만 거기에 없었다
내가 없었기에 나는 포항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남도의 하늘과 다른 청보라빛의 하늘
주홍빛 햇살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세상의 끝, 그 청색의 끝없는 바다
그 바다를 맘놓고 들여다 볼 수 없었기에
주홍빛 햇살이 시누살이하는 죽도시장의
홍게 삶는 향기와 과메기 냄새
좌판의 상인들과 행인들이 떠들고 흥정하는 소리
그런 것을 초장에 듬뿍 찍어 쪽파를 물고 쌈에 싸
입에 맴돌게 했으면 좋으련만 오래, 오래도록-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일몰이 30분도 체 남지 않는
영일대 해변을 바라보는 걸로 만족해야했다
거기에 나는 없었다
어떤 소리, 어떤 느낌, 어떤 향, 어떤 기록이
더 있을 줄 알았는데 담녹빛의, 흐려진 바다는
간신히 부르짖는 내 목소리를 흐리멍텅하게 했다
나는 먼지에 젖어야 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내 가슴 속에 씻어지지 않는 상처를 남겨두고
기름기 진 볼과 머리카락만
바람과 먼지에 내맡겨야 했다
포항 바다를 내 몸 위로 덮을 수 없었다
내 서재 LP판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는
포항 바다의 자취도 나는 찾을 수 없었다
아, 그때도 물론 그 바다에서
나를 찾지 못해 마음이 많이 왜소했지만
억울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그때는 포항을 눈과 귓속 레코드에 담아서
내 필름은 풍성해져 눈과 귀로 흘러내렸다
얼마나 더 볼이 차가워져야 따뜻함을 알까
얼마나 더 향기로워져야 할까 나는?
그런 의문들을 바닷물에 실어보내고
찰싹거리는, 얇은 담뇨같은 파도 앞에서
시간을 셌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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