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의 시초는 행복의 숲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크신 손을 잡고 정원 같은 대학 캠퍼스를 누볐다. 대학 입구부터 늘어선 나무들은 캠퍼스 구석의 미대 건물까지 이어졌다. 미대 건물은 자연대 건물들 사이, 구석에 있었다. 그 뒤에는 산이 우거져 있었다. 학교 뒤편에는 XX산이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며 부채처럼 펼쳐져 있었다. 구름은 산 근처에 가지 못했고, 나는 바위산인 XX산을 바라보며, 미대 건물로 매일 이른 오전 출근을 했다. 삼월부터 녹음이 졌다. 빛에 물든 나뭇잎들이 미대 건물 창문을 두들겼다. 미대 건물 안은 속이 비고 한산했다. 공기가 잘 통해 조금만 걸어도 내 발소리나 목소리가 복도에 다 울렸다. 목소리를 낸 일은 거의 없지만.
나는 왜 오전 일곱 시부터 학교에 왔을까? 학교에 도착한 나는 먼저 성경을 펼쳤다. 실기실 내부로 떨어지는 빛에 의지해 성경을 읽었다.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이젤들이나 화구상자들은 엉망이었다. 날아다니는 먼지들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성경을 다 읽고 나서는 바흐의 골든베르크 변주곡을 켜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들은 냄새가 지독한 유화로 되어 있었다. 나는 터치를 할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
이윽고 열 시, 열한 시가 되면 학교 아이들이 실기실로 하나, 둘 들어왔다. 아이들은 아침부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나를 정말이지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파트장인 나는 그들에게 재료 목록이 준비되었는지를 먼저 확인했다. 그리고 이어 그림을 그렸다. 정오가 되면, 아이들이 점심을 주문하려고 떠드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소란스러웠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점심을 먹거나, 학교 밖으로 내려가 밥 버거를 먹었다. 아이들은 총 열한 명. 처음엔 친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책만 읽었던 재수시절과 달리 난 복음을 위해 이들과 가까워져야 했으므로, 내 닫힌 마음을 활짝 열었다. 화를 내지도, 율법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도 않고 난 이들에게 착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수업 시간이 되면,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그리고 교수님은 우리의 이젤에 놓인 그림을 일일이 점검해 주셨다. 그림 지도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마저 그림을 그려야 했다. 실기실엔 늘 누런빛이 들어왔다. 해가 지기 전에 나는 숲으로 향했다. 볕이 좋은 날이면, 미세먼지가 없는 날이면 숲으로 가서 사생을 했다. 자연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리는 것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빛에 의해 드러나는 형태와 자연물에 맺힌 그림자를 보고 존재를 느낀다. 그 존재들이 하나의 공간에 개별적인 자아이자 전체로 들어선 것을 보고 우주를 느낀다. 그런 희열로 가득 차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림을 그린다.
난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생명이자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있어, 나무들이 군집해 있는 숲은 우리 인간들이 사는 마을이었다. 나는 이 창조물들의 다양한 양태 속에서 하나님을 느꼈다. 정말 나무 한 그루는 수백, 수천의 곡선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이 아니시면 나무를 디자인할 수가 없다. 인간이 만든 것에는 곡선의 변주가 없고 한계가 분명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것에는 한계가 없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뒤에 내가 할 수 있었던 통찰이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게 아니라면 바흐의 토카타나 파르티타 모음곡을 들었다.
대학에서 나는 한 기독교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연과 그림에 정신이 팔려 있느라고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했다. 간신히, 매주 금요 집회에 가는 수준이었다. 늘 내가 이른 저녁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면, 동아리에서 연락이 왔다. 채플을 가자고. 난 당시 채플을 가는 것에는 거부감이 없었으나, 공부가 너무 좋았다. 공부가 좋았을뿐더러, 학생의 사명감은 공부를 하는 데에 쏟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 초반엔 동아리 활동에 미적지근했다. 또 나는 야외스케치 동아리에 들기도 하고, 그곳에서 선배들과 교류를 하면서 일 학기를 보냈다. 그러나 학과에서 술을 마시거나 노는 행사엔 하나도 참가하지 않았다. 시간낭비이자, 나랑은 맞지 않는 행동이라고 생각했기에. 체육대회가 있는 날에도, 모두가 술판을 벌이는 저녁에, 나는 대학원 실기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존재를 종이 위에 드러냄으로써 창조의 실체를 인정하는 숭고한 작업에서 희열을 느껴야 했다. 이렇게 말해봐야 그 행위가 고작 종이 위에 팬 드로잉을 하는 일임을 독자 여러분들은 알아챌 것이다. 대학 생활은 이런 틀 위에서 이뤄졌다. 그것은 크게 구부러진 부분 없이 바흐의 아리아가 흐르듯이,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그 무렵의 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 역시 달라져 있었다.
하나님은 내게 몇몇 아이들을 붙여주셨다. 그들은 모두 학교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나는 내가 그들의 친구가 되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지금 생각해 보면 스쳐간 인연들이지만 말이다. 당시 나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맞았다. 그들의 고민과 어려움을 들어주었고 공감했다.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려 노력했다. 만약 하나님을 알기 전의 나였다면 이들을 무시했을 것이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명령을 알기 전의 독선적인 나였다면. 아무튼, 이런 단조로운 시간들을 보내느라 일 학년 일 학기는 금방 흘러갔다.
난 공허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 속에 충만함을 느꼈다. 더 이상 괴테를 숭배하지도 않았다. 하루 종일 책장을 넘기지 않았다. 성경을 읽고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보내느라 행복했다. 물론 애로사항은 있었다. 내 안에 악은 남아 있어서, 나는 진리 앞에서 나와 달리 행동하는 사람들을 속으로 미워하거나 정죄했다. 당시 나의 큰 오류였다. 모든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와 마찬가지로 난 그런 부분에 있어 완전하지 못했다.
그해 여름엔 기독교 동아리 수련회에 참석했다. 제주에서 열렸는데, 수만 명이 한 자리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했다. 비가 온다 싶으면, 하나님이 비를 그쳐주셔서 찬양 장비의 파손을 막아주셨다. 날마다 비가 왔는데, 하나님께선 그 사이에 해와 맑은 하늘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곳에서 난 주님을 뜨겁게 예배하고 기도했다. 특히 아직 믿지 않는 사촌과 외삼촌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 (나에게 반자동 소총을 선물한 외삼촌 말이다.) 그리고 나의 믿지 않는 부산 친구들을 위해, 또 동아리 원들을 위해 기도했다. 내가 진정한 기독교도가 된 이후와 이전의 극명한 차이는 이렇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진심이 되고, 긍휼을 갖게 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완전하게 사랑하지 못할지라도.
수련회 즈음, 나는 기독교 동아리의 한 선배를 싫어했다. 나랑 정치적인 견해가 맞지 않다는 이유로 말이다. 물론 나중에는 더없이 잘 지내게 되지만. 수련회에서, 하나님은 내가 그와도 화평하기를 원하셨다. 기도 중에 사과를 먼저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사과를 했다.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사박 오일의 수련회동안 우리는 바다에 가기도 하고, 밤에 다 같이 독일과 한국의 월드컵 경기를 응원하기도 하면서 가까워졌다. 적어도 창원지구의 사람들과는. 이후 우리는 조를 짜서 제주미션을 - 제주 지역을 돌아다니며 봉사를 하는 - 떠나게 된다. 이는 오 박 육일의 프로그램으로 한 달 뒤에 있을 태국 단기선교의 예행연습이었다. 그해 칠월 나는 태국에 삼주 동안 머물며 선교활동을 했다. 우리 팀은 방콕의 한 대학에 머물며 현지의 간사들과 공동사역을 했다. 태국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여기 기록하지는 않겠다.
이학기가 시작되자, 난 창원에서 자취를 하게 되었다. 장장 세 시간이 걸리는 통학 거리를 단축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난 동아리의 사랑방에서 동아리 원 두 명과 함께 생활을 했다. 그곳은 창원시 의창구 사림동의 한 반 지하 방이었다. 그것이 내게는 첫 자취였다. 나는 일 학기 때의 루틴을 유지하며 미술작업을 했다. 그랬기에 자취를 했음에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있었다면 사람에 관한 문제뿐이었다. 이 학기 때는 거의 동아리 실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상대적으로 자연보다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렇기에, 이 학기 말이 되어서는 미술 작업 시간을 더 늘리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다. 겨울 방학을 사랑방에서 보낸 뒤, 그림을 더 그리고 싶어 난 사랑방을 나오게 되었다. 학교 뒤편, 기숙사 앞에는 큰 호수가 있었는데 그곳이 나의 사생 장이었다. 그곳에는 키가 큰 전나무들과 플라타너스들이 호수에 얼굴을 드리우고 있었다. 온갖 수풀들과 억새들이 약한 바람에 살랑였다. 청둥오리와 하얀 오리들이 호수 위를 헤엄쳤다. 매일 아침 오리들이 우는 소리에 기숙사생들은 곤욕을 치렀다. 나는 매일 낮 호숫가로 나가 자연을 스케치하고 채색했다.
호숫가를 벗어나서도 나는 그림 그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이 학년 일 학기부터 근무하게 된 도서관에서도, 학과 실기실에서도 나는 쉴 새 없이 스케치를 했다. 이 학년이 되어 복학생 형 두 명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과 계속 같이 다녔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여름이 지나고 이학기가 되는 동안, 나는 또 한 번의 짝사랑을 경험했다. 대상은 태국에서 봤었던 세 살 연상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엔티케였다. 그녀와 나는 날마다 연락했고, 서로 좋다고 말하진 않았지만 애정을 확인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줄 그림을 그렸고 시를 쓰기도 했다. 국제 택배로 서로에게 보내고 싶던 작품들을 주고받았다. 나는 학교 과제로 그녀가 나오는 그림을 여러 차례 그렸다. 호수 위에서 서로 만나는 모습, 또 동판화로 그린 어린 시절의 모습. 이 학년 일 학기에 판화 실에 가야 하는 수업이 있었는데, 이때가 나와 그녀가 가장 활발하게 소통했을 때였다. 내 손과 몸은 판화 잉크로 항상 범벅이 되었다. 난 범벅이 된 손으로 작업을 하면서 그녀의 형상을 새기고 그렸다. 커다란 기계를 돌려 판화를 찍어내면 그녀의 얼굴이 나왔다. 기계 판이 더러워 종이에 잉크가 묻은 적도 적지 않았다. 난 열 장 중 한 장 건질까 말까 한 그 종이들을 잘 모았다. 그리고 내 화구상자 곁에 잘 보관해 두었다. 그녀와 나는 서로의 아픈 점도 나누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를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서로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결국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 시절은 내 인생에서 떠올리기 싫은 따뜻했던 시절이다.
하나 붙이자면, 그때 나는 좀 과격했다. 이십 년간 그렇게 해온 대로 별났다. 나는 그녀가 좋다고 집에 말했고, 돈을 벌어 태국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우리 어머니는 이런 나를 보고 얼마나 뒷목을 잡으셨을까. 그때 하나님은 조급함에 사로잡혀있는 나에게 어떻게 하셨던가. 그분은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을 말씀으로 보여주시며, 나중을 위해 나의 이삭을 받칠 믿음을 요구하셨다. 나는 결국 그녀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았다. 스물두 살의 나에겐 얼마나 뼈아픈 일이었는지 모른다.
스물두 살 가을과 겨울은 정말이지 쓸쓸하게 보냈다. 나는 상실한 가슴을 부여잡고 내 빈 곳을 하나님 아닌 사랑으로 채우려 애썼다. 또다시 짝사랑을 시작했고, 그 결과 내 가슴은 상처로 물들게 된다. 그즈음의 일들에 대해서는 서술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