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살은 고통으로 시작해서 고통으로 끝이 났다. 나의 스물세 살은, 이후 사 년간의 고통의 꼬리를 입에 물고 달리는 미친 농부와 같다. 이 구간을 쓰는 일이 내겐 가장 치욕스럽고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이 구간에 머물고 있다. 날 설국에서 벗어나게 해 줄 열차를 기다리며, 오지도 않을 그 열차를 기다리며 나는 눈을 맞고 서 있다.
그 해는 코로나가 시작된 해였다. 푸르던 하늘은 잿빛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하얀 마스크를 끼기 시작했다. 거리를 나가보면 온통 하얀 점 투성이었다. 그 하얀 점들은 회사로, 공장으로 줄을 지어 갔다. 해외 뉴스에서 연이은 부고 소식이 들려왔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사기 위해 약국에 줄을 섰다. 주변에서 기침만 콜록거려도 범죄자를 보듯이 그 사람을 쳐다보는 일들이 빈번해졌다. 모두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이윽고 시내는 텅 비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머리를 짧게 치고 마스크를 쓴 채 밖으로 나갔다. 함안 칠원에서 창원까지 두 시간 여의 거리를 버스를 타고 갔다. 나는 예술대 행정실에서 근로를 해야 했다. 모든 수업들은 온라인으로 대체되었다. 대학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쳐다보기 힘들었다. 직원들과 근로 학생들을 빼고는 누구도 학교에 나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어떤 바람이 불었는지, 세상이 그런 와중에 난 서울로 진출하고 싶었다. 굳이 가야 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나는 더 큰 세계에서 미술작업과 대외활동, 교류를 하고 싶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는 내게 불행을 불러왔다.
또 나는 당시 강박적으로 종교 활동을 했다. 그 해 겨울 수련회에서 최후의 심판에 대한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난 그리스도가 내 모든 죄를 사해 주셨다는 진리에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내 힘으로 내 모든 죄를 회개해 구원에 이르러야겠다는 망상을 품었다. 그 생각은 정말이지 나를 정말 좁고 힘든 길로 이끌었다. 나는 하루 세 시간씩 강박적으로 기도를 했다. 그리고 강박적으로, 율법적으로 부모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했다. 강박적으로 이웃을 도왔다. 그러고 나니 정작 나를 위한 시간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학생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미술 작업을 해야 했음에도. 난 공포에 질려있었다. 내 목숨을 보전하는 일 이외의 것은 모두 한가로운 일로 여겼다. - 이런 성향은 내가 그간 생활해 왔던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믿었다. - 그런 상황에서 난 서울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서울에 가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오래 묻지도 않았다. 가고야 말 거라는 욕망 속에 하나님의 뜻을 맞추려 했다. 나는 무턱대고 서울에 방을 알아보았다. 서울의 어느 학사에서 학사 생을 모집한다는 방을 보았다. 그때 당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도움인 줄 알았다. 후에 보니,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가득했지만.
고작 한 달간의 준비 끝에 난 서울행 짐을 쌌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를 서울 남부터미널까지 바래다주셨다. 가족과 함께 학사에 짐을 풀었다.
코로나는 나날이 극성을 더해가고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마저 코로나 공포에 질려 병적인 성향을 가지게 될 것 같았다. 내가 그랬다. 나는 비누를 쓰듯이 손 소독제를 썼다. 내가 스치는 모든 곳에 손 소독제를 바르고 뿌려댔다. 핸드폰, 문고리, 손잡이, 가방 끈, 식탁 등 생활의 모든 반경에. 내 손에 의해 감염되어, 누군가 혹시라도 죽기라도 할 까봐 몹시 두려워했다. 나의 부주의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했다. 그때 내 옆에서 예수님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XX아, 너 뭐 하니?” 서울에 가서 이런 내 강박이 더 심해졌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서울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유통업체의 부품처럼 몰려다니는 곳이다.
서울에 짐을 풀자마자, 난 편입입시 학원에 다녔다. 학원은 서초에서 가까운 거리인 방배동에 있었다. 편입은 쉽지 않았다. 다시 지옥 같았던 입시 미술을 해야 했다. 자유롭게 그리는 데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겐 힘겨운 일이었다. 학원엔 아예 미술을 처음 접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입시 미술을 하는 것은 유리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몇 년 만에 입시 미술에 대한 감각은 다 죽어 있었다. 난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편입을 위한 미술연습은 매일 오후 두 시부터 밤 열 시까지 이루어졌다. 단 한 시간의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쉴 시간도 마땅치 않았다. 그 상황에서 가사를 해야 했고 창원 XX대학의 남은 수업과 과제를 다 이수해야 했다. 어떻게 해냈는지, 지금의 내가 보면 당시의 내가 대견하다.
이제는 내가 제일 끔찍하게 여기는 부분을 서술하려 한다. 이 일을 적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이전에, 두 명의 박 씨에 대해 서술했던 것을 기억력 좋은 독자들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내 인생을 뒤바꾼 세 명의 박 씨가 있었다는 사실도. 이제 그 마지막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 형의 이름은 박주형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네 살 많았다. 그는 장교출신으로 내가 학사에 들어왔을 당시 막 장교로 제대했다. 학교는 서울의 XX대학 출신이었다. 당시 그는 서울XX대 교육 대학원과 편입을 준비하려 했다. 주위에선 그가 최고의 선생님이 될 것이라는 평이 자자했다. 모든 사람이 그의 학적을 보고 그를 떠 받들었다. 고작 스물일곱 밖에 안 된 인물이었음에도. 나는 그런 그와 한 공간에서 살게 되었다.
나는 군대를 나오지 않았다. 나이는 스물셋밖에 안 되었다. 더욱이 지방대학을 다니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그 점만 가지고도 그는 나를 얕보았던 것 같다. 나는 상경한 지 일주일 만에 그에게 크게 혼났다. 그는 나를 거실에 두 시간 동안 세워두고 인신모독적인 말들을 쏟아냈다. 이유는 내가 전기밥솥에 밥을 일곱 시간 이상 앉혀놨고, 화장실 변기에 물을 튀겼으며, 싱크대에 거품을 몇 방울 튕겼고, 음식물 쓰레기를 조금 쌓아 두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기억나는 말은 많지 않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봤던 스물세 살 중에, 네가 최악이다. 넌 개념도 없고, 센스도 없고, 예의도 없다. 너는 쓰레기다. 그러니 너와 그동안 같이 살았던 사람들도 쓰레기일 것이다. 너 인생 그 따위로 살면 사회 나가서 큰코다친다.” 그는 그런 말을 거의 두 시간을 쏟아냈다. 이는 나와 함께 자취를 했던 창원 사람들까지 욕보이는 말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또 나를 세워두고, “너 잘못했지? 네가 잘못한 게 맞지?”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럼 나는."네. 제가 잘못했어요."를 연신 반복했다. 그럼에도 그의 추궁은 끝이 나지 않았다. 나는 그 일을 당한 후 몹시 암울한 기분이 되었다. 때마침 부산에 있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서러운 마음에 전화를 받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다. 나도 내가 울음을 터트릴 줄은 몰랐다. 난 완전히 기가 죽어 버렸다. 나 자신을 쓰레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살아왔던, 하나님을 만난 이후의, 인생이 다 잘못되었다고 믿게 되었다. 이 상태로 주일엔 교회에 갔고, 교회에서도 그를 만났다. 나는 그를 몹시 두려워했다. 미술학원에서도 정상적으로 행동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