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spel
과거를 먼저 치유하시는 주
(드라마 '더 초즌'을 보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실 때, 그 과거를 먼저 손보신다. 사마리아 수가 여인이 자신의 과거로 인해 괴로워할 때, 예수는 "나를 따르라" 하시기에 앞서 그녀의 치부라고도 할 수 있는 과거를 건드셨다. 건드셨다는 표현은 노골적이지만 정확하다. 예수는 그녀에게 남편이 다섯 있는 것을 아셨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가 남편이 아닌 것도 알고 계셨다. 그녀는 그 치부 때문에 사람들이 우물에 물 길으러 오지 않는 한낮에 물을 기르러 왔고, 그 치부는 그녀가 제대로 살아가는데 큰 방해물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아셨다. 예수께서는 그녀의 과거의 상처와 잘못 일그러진 낮은 자화상을 한 번에 치유하신다. 예수는 그녀에게 일부러 다가가셔서, 죽은 자도 살리시는 그 생명의 입술로 그녀의 환부를 건드리시고 단번에 낫게 하신다. 그녀의 마음속에 진정한 복음이 들어가자 그녀는 기뻐 뛰며 자신의 상처로 얼룩졌던 마을로 들어가 사마리아에서 예수의 최초의 증인이 된다. 그 덕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인지'하게 되고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 토양을 가지게 된다.
이 동일한 사역의 원리는 두드러지게는 예수를 3번 부인한 베드로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서 나타난다. 예수가 로마 군정에 잡히시던 밤, 베드로는 예수를 3번이나 부인했다. 하지만 부활하신 후 예수님은 베드로를 직접 찾아가셔서 그의 환부에 생명의 입술을 3번 갖다 대신다. 예수는 베드로의 과거가 앞으로의 사역과 증인으로서의 삶에 치명적인 걸림돌이 될 것을 아셨다. 그래서 예수는 베드로가 사역에 나서기 전 그의 상한 마음을 먼저 손보신다. 베드로는 3번이나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날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들어야 했고 상처가 치유되어 그의 시대 가장 위대한 복음전도자 중 한 명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한다. 승천하시기 전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그를 고치시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 예수는 "내가 널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거라"하고 말씀하신다. 생명의 입술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듣자 죄책감과 자기 훼손으로 일그러졌던 여자의 심령은 다시 살아나게 된다.
두드러지지 않는 예로는 막달라 마리아, 세리 마태를 들 수가 있다.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린 여자였다. 누구도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았고 그녀도 다른 사람을 정상적으로 가까이할 수 없었다. 일설에서는 그녀가 창녀였다고 추측하는 설도 있다. 여하튼, 예수는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셔서 그녀를 완벽하게 치유하신다. 그녀는 하나님의 딸이 되었고 이후 복음을 진지하게 받들고 예수의 죽음 이후에도 예수를 따르는 충실한 제자가 된다. 제자라는 표현이 없다고 해서 그녀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잘못된 일일 것이다. 세리 마태, 마태는 위대한 마태복음의 저자이다. 유대인의 족보까지 복음서에 써 놓을 정도로 유대와 아브라함의 역사를 사랑했던 이 사람이 민족의 배신자였던 사실은 역설적인 것이다. 그만큼 예수를 만나기 전에 세리로서 자신이 도저히 다가갈 수 없었던 유대인 동포, 그리고 그 스스로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마음이 치유가 되었다는 반증이다. 세리는 지금으로 따지면 고위 친일파이다. 예수께서 그런 이를 제자로 부른 것이 놀랍고, 세리로 살 수밖에 없었던 그의 상처가 예수로 인해 고침 받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주를 넋 놓고 바라볼 뿐이다.
죄와 상처는 불가분의 관계이고, 오늘날 이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도, 상처가 없는 사람도 없다. 예수님은 그런 상한 마음 있는 자들을 토닥이시며 "내가 널 정죄하지 않을게. 괜찮다. 너의 슬픔을 내게로 가져오렴. 난 너의 하나님이다" 하신다. 이것이 예수와 사람들의 죄를 찾아 지적하던 바리새인들이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고, 예수와 바리새인들의 본질적인 차이였다. 신이신 그가 한 인간으로서 대중들의 랍비로서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전혀 다른 파격저인 행보를 보여주니 죄에 지치고, 상처에 지쳐있던 사람들은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세리, 죄인, 어부, 기술자 등 사회에서 하대 받던 사람들과 함께 하시던 예수. '그 예수는 내게 누구신가' 하는 질문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는다. 예수는 나와 우리의 메시야인가, 그저 나와, 우리와 상관없는 멀리 계시는 하나님인가. 이는 예수가 나의 메시야가 되려면 그에게 필수적으로 고침 받아야 함을 역설적으로 뜻한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와 내가 상관이 없다" 하신 말씀처럼, 우리는 구원받은 후 오늘도 죄와 상처를 싸매 들고 그분께 나아가야 한다.
"목마른 자는 오라, 슬픈 마음 있는 자, 근심에 쌓인 자도 오라." 예수께선 지금도 갈보리 그 언덕에 서서 말씀하시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