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spel
세상엔 신들이 많으나 참 신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성경을 읽던 도중 문득 이 사실을 깨닫는다.
이 세대에, 예수님은 인기가 없으시다. 전에도 없으셨다. 기적을 일으키시고 상한 마음을 고치시는 그분께 모두 종려나무를 들고 경배했다. 그가 진짜 가려 하시는 길을 드러내 보이셨을 때는 모두 질색하며 그를 떠나갔다. 더러는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욕을 하며 그와 그가 가시는 길을 비웃었다. 그가 가시는 길이 로마에 지배받던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화려한 승리의 길과 다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정반대의 초라하고 참혹한 길이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가 기꺼이 걸으신, 고난과 고초의 갈보리 언덕 해골 길. 그 길이 그가 선택하신 십자가의 길이었다. 아, 십자가. 십자가 앞에선 내가 원하는 명예도, 화려한 삶도 한 줌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기분이다. 나의 사욕과 더불어 나 자신도 사라지는 기분이다. 그러나 나는 사라지지 않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아들의 품 안에 안겨있다. 그분의 두 팔에 구속된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움을 느낀다.
사람이 날개가 없는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내가 입은 가벼운 면 티셔츠 때문일까. 내가 이 세상에 비천한 자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조차 사람의 지혜보다 지혜롭다. 하나님의 약함도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하다. (고전 1:27, 28) 그러나 그분은 그것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 힘과 지혜를 휘몰아치는 바람의 장중에 감춰 놓으신다. 그분은 뛰어난 사람들의 귀를 막으시고,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에게만 그 동화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하나님은 비천하고 어리석은 나를 선택하셨다. 이 글을 보고 있을 이름 모를 여러분을 선택하셨다.-또 지금도 부르신다.-그가 이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자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무력일까? 아니다. 은혜와 화평의 십자가이다. 성경의 모든 길은 십자가로 통하고,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뜨거운 피를 쏟아내셨다. 철철 흐르는 보혈에 목욕한 자,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되고, 이 세상을 위한 소명을 부여받게 된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을 위해 품으셨던 소명과 동일하다. 원수 같은 세상을 사랑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돌이키기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것. 유대인들이 멸시했던 십자가의 길이요,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이다. 이 방법이 바람의 장중에 감춰 놓으신 하나님의 지혜이다.
주변 사람들은 내게 수많은 조언을 한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든 잘 모르는 사람이든. 나의 기분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깊이 헤아리지 않는다. 그 조언들에 대해 그들에게 물어보면, ‘나를 생각해서 하는 조언’이라고 할 것이다. 내가 만약 짜증을 내거나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다면, 그렇게 반응하는 나를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나는 그들의 심리를 알고 있다. 그들의 눈에 그들보다 못나 보이는 나를 은근히 얕보고 있는 것이다. 또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고는 그 지혜를 내게 뽐내고 싶은 것이다. 나는 틀렸고 자신은 맞다는 식으로 말이다. 혹자는 내가 너무 꼬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나는 진정 나를 위해 하는 조심스러운 말과 그렇지 못한 무례한 말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또 사람에게는 직감이라는 것이 있다. 그들은 모른다. 내 인생과 내가 겪었던 정체를 알 수 없었던 고통과 고통의 깊이를. 오랫동안 죽고 싶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나는 약을 먹었다’-그러니 제발 그 얘기는 하지 말라-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지혜일까. 나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예시를 들었을 뿐이다. 설령 그들 중 하나가 나보다 더 침체되는 삶을 살아, 내가 겪은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그 사람의 인생과 나의 인생은 본질적으로 다른 성질의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내 속을 함부로 들여다보려 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날 그들의 지혜로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얕본다. ‘얘는 왜 이걸 안 해? 얘는 왜 이렇게밖에 못해?’ 세상이 나를 엄한 눈초리로 노려볼 때, 그 시선이 적나라하게 느껴져 내 마음이 저려올 때, 나는 내가 읽고 있던 작은 책으로 시선을 향하게 한다. 그 책은 바로 성경이다.
성경은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셨습니다’(고전 1:27)
나는 이 짧은 구절에 위로를 받는다. 날 향한 세상의 시선과 표정과 말투가 원래 세상의 생리이거니 한다. 그리고 날 비천하게 만드신 건 하나님의 섭리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날 그렇게 창조하셨고, 그런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세상 속에서 선택하셨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세상의 방법 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면 된다.
(유대) 사람들은 기적을 구한다.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롭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제시하신다. (고전 1:22, 23) ‘이것이 기적이고, 지혜이다’라 시며. 하나님의 지혜와 기적은 유대 사람들에게는 거리낌이고, 그리스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다. 모르겠다. 내 삶의 방식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같은 선상에 서 있는지 정말로 모르겠다. 둘 다 사람들에게 어리석음으로 비치는 것밖에는 공통분모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들 그리스도는 그 값진 피로 나를 사셨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도 내 안에 계신다. 그들이 날 욕 하건 말건, 나는 그분 안에서 내 삶을 살아가면 된다. 이제껏 그렇게 살아가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그분이 제시하는 방법대로 살아가면 된다.-단순히 계명을 지키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다른 사람들의 불쾌하고 무례한 말보다는 그분의 엄하고도 부드러운 말과 자비로운-피 묻은-손이 내게는 더 와닿는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이다’라는 말로 글을 마무리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세상에 신들은 많으나 참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는데, ‘너는 세상 사람들을 따를래? (종이 될래?) 하나님을 따를래?’ (자녀가 될래?)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함 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인기가 없어도, 사람들이 욕을 해도 괜찮다. 그분만 내게 괜찮다고 해주신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