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이야기

마음의 둥지

by 커피탄 리

강에 대한 글을 적으려다 보니, 일단 전체적인 맥락부터 잡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무작정 우리나라 강 개수를 찾아보려 했고, 왜 거기에 꽂혔는지는 모르겠지만, 타이핑해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사람들이 4대 강 이외의 강에는 관심이 없는지, 검색 결과가 없었다. 결국 우리나라 –북쪽을 포함한-전역의 강 숫자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말하고자 한 바는, 그만큼 우리나라에 강이 많다는 것과 우리가 강과 가까운 민족이라는 것이었다. 집 밖에만 나가도, 잘 만들어진 무지개다리 아래로 강줄기가 좁게나마 흐르고 있고, 조금만 걸어 공단 쪽으로 접어들면, 다대포와 이어지는 낙동강의 큰 줄기와 만난다. 강변에는 사람들이-낮이나, 밤이나 많다고 할 수 없겠지만-곧잘 삼삼오오 모여든다. 맥주 캔을 들고 오는 이들도 있는 반면, 아들자식, 딸자식 손을 잡고 오는 부부도 있고, 노부부도 보이고 단순히 운동을 하기 위해 뛰는 사람들도 있다. 자전거를 몰거나, 혹은 뛰거나. 왜 사람들은 강 주변으로 모여드는 걸까? 강 근처에 가면 식수를 얻을 수 있다는 우리 인류의 유전법칙이 광범위하게 작동된 것일까? 아무튼, 사람들이 강을 좋아하는 만큼, 나도 강을 좋아한다.


푸른 강이든, 흰 강이든, 붉은 해가 지는 강이든. 한강이든, 낙동강이든, 영산강이든, 라인 강이든, 미시시피 강이든. 강에는 고유의 문법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일단 강변을 따라 온갖 풀들이 얼기설기 얽혀 거대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그 풀 주위에는 이름 모를 예쁜 색색의 꽃들이 고개를 흔들고 있다. 그 아래론 개구리나 여치, 메뚜기 같은 놈들이 뛰어다니고, 그 위로는 물새나, 두루미, 오리 같은 녀석들이 날아다닌다. 물론 강 위에도, 아래에도 많은 생물이 살고 있다. 그렇다 강은 이렇듯 자유분방하고 활기로 넘치는 것이다. 생태계의 보고란 표현은 목이 잘린 지 오래다. 그렇다면 어떤 표현을 쓰면 좋을까? 언어를 다루는 시인으로서, 어떤 표현이 좋을까?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쓰고자 하는 바를 써야겠다.


나는 감성적인 사람이라, 강하면 ‘위로’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도도하고 유유하게 흐르는 강물. 무거운 해가 배를 담그고 엎어진 바람에 물결이 금빛으로 출렁거리는. 숫기 없는 바람에 억새 풀들은 살살 흔들거리는. 나무들이 바람난 애인을 기다리는 남자처럼 멍하니 서 있는. 나무들의 깃 위로 새들이 깃을 펄럭이며 내려앉는. 그리고 진녹빛으로 우거진 강 건너편 풀숲을 보며 생각에 잠긴 사람들이 벤치나 돌계단에 앉아 있는. 강과 강을 잇는 대교 기둥 아래에서 물비린내가 흠씬 올라오는. 잠자리나 각종 곤충이 풀 위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뭇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자전거 보도 위를 달려가는. 강하면 이런 풍경들이 떠오른다.


나의 서울시절, 나는 종종, 바쁜 일상 가운데 일주일에 한 번은 한강을 찾았다. 한강이 하늘빛을 머금어 푸르게 보이는 낮에도. 한강이 어둠에 묻혀 무수한 조명 불빛들을 담고 있는 밤에도. 자주 걸어서 한강을 찾았다. 내가 살던 곳에서 한강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한 시간 반. 왕복으로는 세 시간 거리였다. 한강에서 걷는 시간 약 한 시간을 포함하면, 길게 잡아 네 시간이 소모되는 코스였다. 하루에 여덟 시간씩-대학 편입을 위한-그림을 그리고,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쉬어야 할 주말에, 나는 왜 모든 교회 모임을 마치고 한강으로 향했을까? 나를 포함한 누구도 나에게 묻지 않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저 보고 싶었다. 연인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아닌, 집이나 고향, 혹은 어머니의 품을 찾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나의 첫 집이 강 속이라 그런가?


당시 나는 피폐했다. 고생을 열거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아 그냥 적어본다. 하루에 한 시간도 숨 돌릴 틈 없이 바빴다. 자기 전, 감사 일기를 적기 위해 쓰는 한 시간이 나의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다. 그런 와중에, 나를 파멸로 몰고 간, 한 사람의 무분별한 언어폭력 있었다. 그 덕에 나는 서울에서 내려올 때, 정신과 병명 4개를 달고 내려왔다. 이 정도만 적어도, 알만한 분들은 내 스트레스가 어땠는지 짐작하리라 믿는다. 그런 상태에서, 마음 둘 곳 하나 없는 타향에서 내가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곳은 강뿐이었다. 물론 교회 예배당도 있었고, 핸드폰 통화도 있었지만, 내가 가장 안정을 느낀 장소는 강이었다. 강에 가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어떤 행동도. 그저 눕거나 앉아서, 물결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도, 강은 나에게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어떤 오리가 수풀 뒤에 숨어 있는지, 어떤 물고기가 물살을 가르고 있는지, 요트가 뿌리고 가는 강물의 향이 얼마나 시원한지. 햇살이 얼마만큼의 몸 면적을 물속에 담갔는지. 등등. 그런 것들을 가만히 생각하고 있으면, 마음이 자연히 치유가 되는 것이었다. 그 많던 입시에 대한 스트레스가. 타향에서 돈을 아껴 써야 한다는 강박과. 사사건건 부딪히는 룸메이트에 대한 두려움과.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걱정 따위가. 어떤 이에겐 별 것 아닐 수 있는 이런 상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걷고 있어도 시원했고, 다리가 아파 저려 와도 오히려 살만했다. 강이란 생물은. 내 이야기를 좀 더 덧붙여보자면, 나는 상경한 지 2개월 만에 병을 달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당시 내가 시달렸던 환청은 일상생활을 불가능하게 했다. 입시를 포기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낙동강이 지척인 이모네로 요양을 갔고, 매일같이 낙동강 변을 뛰었다. 지독한 강박과 환청을 쫓아내기 위해서. 만보기를 켜고, 해가 지는 낙동강 변을 뛰고 또 뛰었다. 그때도 강은 나에게 한없는 위로를 주었다. 내가 서울에서 느꼈던 것처럼. 이러니 강하면 ‘위로’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리는 것이다.


강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다가 위로라는 주제를 꺼낸 이유가 있다. 요즈음에 나는, 마음에 외로움을 많이 느끼고 있다. 알 수 없는 불안과 우울이 주로 혼자 있을 때 몰려온다. 이전의 나였다면 혼자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혹은 혼자 산책을 하거나 글을 썼을 것이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그런 것 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사랑에게 많이 목을 매다나 보다. 좋지 않은 습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간을 혼자 보낼 만한 거리를 찾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떠오른 강이었다. 최근에는 강에 자주가지 않았지만, 그런 느낌이 든다. 강에 다시 가면 내가 지금 느끼는 마음의 공허함을 다소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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