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하는 겨울 이야기

by 커피탄 리

여름에, 그것도 장마가 시작되는 한여름에, 왜 느닷없이 겨울 이야기를 꺼내는지 모르겠다. 글을 쓰는 자신도. 글을 쓰는 내 귀에는 하얀 줄 이어폰이 꼽혀 있다. 그 기계에서는 쓸쓸한 느낌의 바흐의 푸가가 흘러나온다.

겨울에, 겨울에 내리는 눈을 본 적이 얼마만이던가. 오늘 글도 역시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다. 당분간은 이 흐름을 유지하고 싶다. 뜬금없지만, 나는 부산에 살고 있다. 부산에는, 놀랍게도 눈이 오지 않는다. 서울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겁을 할 것이다. 서울에는 눈이 내리면, 허리까지 차오른다니까. 서울에선 눈이 똥일까? 왜, 너무 많이 먹어서 질리는 삼겹살처럼 말이다.

아무튼 부산에는 눈이 오지 않는다. 일 년에 한 번 올까 말까이다. 부산에선 눈이 오면, 산꼭대기 중학교에선 아이들이 쌀알처럼 쏟아져 나온다. 새하얀 운동장으로. 그리고 서로 귀기 어린 참호전(?)을 펼치는 것이다.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도, 눈을 혀에 대어 보는 아이들도, 사진을 찍는 아이들도 있다. 그렇게 촌스럽게 눈과 사랑을 나누고 나면, 아이들을 기다리는 건 반가운 종례 종. 아이들은 산꼭대기에서 눈뭉치처럼 굴러내려 간다. 산 아래로.

그런데, 왜 겨울 하면 눈이 오는 이야기를 해야만 할까? 낭만적이라서? 눈이 오는 이야기는 이제 너무 뻔하지 않은가? 서론은 이 정도로 하고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난 겨울 풍경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겨울에 거리를 걷는 것을 좋아함에도. 앙상하게 헐벗은 가지들이, 외롭게 색이 바랜 건물들이, 허옇게 뜬 풍경 아래 일렬로 늘어선 거리를. 강을 이야기할 때와 다르다. 바다를 이야기할 때와도 다르다. 겨울은 즐겁고, 즐겁고 한없이 들뜨기만 한다. 연신 펼쳐지는 축제 때문일까? 한반도 남부지방의 겨울에는 눈이 오지 않기에, 그저 나무들이 바람의 톱질에 휘청이는 것을 볼 뿐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털옷과 롱패딩으로 꽁꽁 싸맨 채. 대학교 근무지로 가는 길. 그 시기에 듣는 음악에는 장작 타는 냄새가 난다. 나의 겨울은 따뜻했다. 근무지의 사람들에게 그림을 그려줬던 그 겨울. 근무지 건물 안의 히터 온기, 내가 입었던 코트의 촉감, 티백으로 된 메밀차의 향, 두툼한 옷을 입은 사람들의 웃음소리까지. 내 겨울은 즐겁고 즐겁도 들떠 있었다.

그렇지 못한 겨울이 있었다. 그 겨울에는 눈이 내렸다. 나는 번화가 한 모퉁이의 입시미술학원에서 초조하게 수시 결과를 기다렸다. 크리스마스트리는 나와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 해나, 그 이전 해나. 그 이전 해부터 이야기를 해보겠다. 자퇴 후, 2년의 공백을 가진 후 나는 입시미술학원에 들어갔다. 거기서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사람냄새를 맡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나는 항상, 밥을 먹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책 위에 머리를 처박았다. 사람들이 옆에 있어도. 사람과 멀어지기로 결심하고서부터였다. 하지만 나도 외로운 생물. 사람 맛을 보기 시작하자, 그 갈망은 끝도 없어졌다. 아이들은 내게 다가왔으나, 난 그들을 밀어냈다. 내가 마음 문을 열고 다가갈 즈음엔, 그들은 대학 입학장을 들고 온 거리를 돌아다녔다. 나는 그 해 2월까지 불이 켜져 있던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며, 쓸쓸하게 실기실로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재수를 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아이들은 그동안 흔적조차 보지 못했다. 연락이 오는 친구도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연락할 수도 없었다. 그 정도의 막역한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우리는 그저, 밥을 같이 먹는 사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감상은 이쯤 집어치워두자. 아무튼 그때의 나는 수시실기를 마치고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눈이 내렸다. 온통 노랗게 물들었던 거리가 초라해지고 새하얘졌다. 그때 자주 먹던 뼈다귀 해장국이 생각난다.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면, 나는 안경알을 닦았다. 입에 김치를 넣을 때, 육즙이 흘러나왔다. 그 육즙은 내 책 위로 떨어졌다. 책 이름은 <남한산성>.

수시 1차 발표가 나왔다. 후보순위는 6번. 그러나 여전히 나는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여야 했다. 흑연 가루는 이젤 아래로 떨어졌다. 일주일이 흘렀다. 2차 발표가 나왔다. 순위는 3번.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겐 정시는 없었다. 더 할 수 있는 마음의 여력이 없었다. 안 하던 기도를 했다. 눈은 계속 내렸다. 날 실은 봉고차 바퀴는 매일같이 굴러갔다. 일주일이 다시 지나갔다. 3차 발표에서는 후보 순위가 1번이 되었다. 내 심장은 고동쳤다. 다시 일주일이 흐르는 동안, 떨리는 심장을 붙잡고 학원을 오갔다. 앞에 한 명만 사라져 준다면. 나는 마구 손톱을 물어뜯었다.

흰 눈 사이로, 검은 깃털이 마구 쏟아졌다. 깃털은 사정없이 내 눈을 때렸다. 얼어붙은 강물에는 균열이 생겼다. 봄이 올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그때는 1월이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변함없이 깜빡거렸다. 비너스의 대리석조각상은 어둠 속에서 약하게 빛났다. 나는 조용히 화구를 정리했다. 내가 그렸던 종이들의 질감을 한 장씩 느껴보았다. 까끌까끌했다. 학원 문을 조심스레 닿았다. 비가 와서 눈이 녹았다. 햇빛이 눈을 더 녹였다. 다음날 나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눈이 내렸다. 경기도로 가는 버스 창안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온 세상이 하얗게 덮였다. 아름다웠다. 버스에서 내려 사람 없는 거리를 말없이 걸었다. 그렇게 걷는 게 참 좋았다.

다시 나는 메밀차의 향을 맡고 있다. 귓가에는 교직원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담요가 무릎에 쓸린다. 내가 그려준 그림을 들고 즐거워하고 있는 소리가. 들뜨지 않는다. 착잡하지도 않다. 그저 고요히, 고요히, 그때 그 겨울을 떠올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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