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는 '오늘의 커피'는 안돼요."
주말이면 종종 찾았던 카페에서 약 1년 전 '오늘의 커피'를 처음 맛보고는 "내가 좋아하는 커피는 이런 거야."라고 호들갑을 떨었던 나였다. 그 후로 주말이면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러 그 카페에 가는 것이 자신을 위해 내가 해주는 몇 안 되는 작은 노력 중 하나였다. 오늘 다시 찾기 전날, 그러니까 어제저녁에 침대에 누워 이 카페에서 '오늘의 커피'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모카마스터'라는 드립 커피 머신을 찾아보고 괜히 설레었던 나였다.
주말에는 판매량이 너무 적어 어쩔 수 없었다고 바리스타님은 설명해 주셨다. 토요일 오전 11시 코로나19 때문에 테이블과 의자가 한쪽으로 싸악 비켜진 카페 안에는 아무도 없어 그러려니 싶다가 아니, 주말에 마시는 커피는 다르단 말인가? 못내 아쉬웠다. 커피 인생 오직 블랙(에스프레소 베이스든, 드립이든) 외길만 걸어온 나로서는 블랙으로 마실 수 있는 선택지 중 하나가, 꽤나 마음에 들었던 하나가 없어져 버린 상황. 그나마 '오늘의 커피'와 가장 비슷할 것 같은 핸드 드립을 주문하고 또 아쉬운 마음에 드립 백 하나를 더 골랐다.
커피는 무난했다. 아니 훌륭했지. 그런데도 '오늘의 커피'만 생각이 났다. 나는 커피 사람이다. 차도 싫고 탄산음료는 더 싫다. 오로지 물 아니면 커피, 블랙 커피. 변하지 않는다. 커피 맛은 신맛보다는 탄맛. 뉴욕에 살 때 동네 오래된 델리에 가면 그날 아침 대용량으로 내려놓은 커피가 있었다. 커피가 잘 팔리지 않는 날이면 특히 열에 오래 방치되어 제대로 탄맛을 내는 커피를 마셔야 했다. 이건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원두가 신선하다 못해 날카롭도록 신맛을 내는 커피는 참기 어렵다. 이런 커피는 양도 적다. 그래서 신맛보다는 탄맛이다. 변하지 않는다. 참고로 이 카페의 '오늘의 커피'는 가장 적은 신맛으로 가장 신선한 맛을 내주는 커피였다.
다 변했고 더 변할 것이다. 불확실한 것들이 가득하다. 그러다 보니 확실한 것, 변하지 않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나의 커피도 물론 집착의 대상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여기 있었고 커피는 나라는 사람이 마셔야만 하는 것으로 나에게 주어졌다. 그것도 블랙으로. 나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나에게 주어졌다. 한 집에서 사는 사람, 학교에서 만난 사람, 회사에서 만난 사람, 그 사이에서 만난 사람. 내 자신에게 커피는 항상 블랙이 옳았지만 나 아닌 사람 앞에서는 다른 선택을 하기도 했다. '나는 원래 블랙인데'를 속으로 항상 품고 있었지만, 어떤 사람 앞에서는 텁텁한 라떼를, 어떤 사람 앞에서는 죽어도 싫은 헤이즐넛을 선택하는 내가 되기도 했다. 내가 블랙인 게 싫다고 하는 사람을 잃을 용기가 없었다. 이제는 아니다. 내가 블랙일 수 있는 사람이 나에게 옳다. 그렇게 하지 않을 시간이 없다. 코로나가 그리고 마흔이 코앞에 닥치고서야 깨달았고, 앞으로 블랙을 더욱 철저하게 택하는 노력을 수없이 해내야 할 터이다.
이 불확실성의 소용돌이에서 변하지 않는 '나'를 단단히 붙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이건 처절한 생존 의지다. 커피는 없으면 못 살지만 겨우 신맛보다 탄맛을 좋아하는 정도로 커피를 잘 알고 마시는 것도 아닌 내가 좋아하던 '오늘의 커피'를 주말에 마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오늘. 변하지 않는 '나'라는 아이덴티티의 존립을 위해 꼭 필요했던 일상의 의식 행위 하나가 갑자기 없어졌다는 위기를 느낀 오늘. 김연수 작가님이 '시절일기' 프롤로그 중 불교경전을 인용해 그랬다. 걸어서는 세상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고. 오직 답은 내 안에 있다고.
2020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