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에서 에리히 프롬이 시를 꼭 읽으라고 했던 이유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현대 사회는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풍요로운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왜 행복하지 않은 걸까? 그 이유를 "소유냐 존재냐"의 작가 에리히프롬을 통해 알아보기로 한다.
무한히 소비를 자극하고 조장하는 온갖 상품 광고 속에서,
고가의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 행복한 삶에 이르는 길일까?
프롬은 인간이 고독과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른 특징이 있는데 바로 이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세계를 인지하는데, 자신이 세계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것으로 인해 불안과 고독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세계와 합일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세계와 합일을 이루었다고 느끼게 되면 행복을 느끼게 되는데, 이때 인간이 세계와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기를 하느냐에 따라 행복을 느낄 수도 있고 불행해질 수도 있다고 한다.
프롬이 제시하는 두 가지 관계맺기 방식은 크게
(1)소유적 실존 양식과
(2)존재적 실존 양식
이다.
소유적 실존 양식은 소유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일체감을 느끼는 방식인데, 소유를 통해서 감각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바로 소유를 하고 나서도 또 소유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탐욕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탐욕은 결국 소유물을 차지하고자 하는 경쟁과, 타인의 소유물을 빼앗고자 하는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권력을 독차지하려는 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프롬도 인간이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소유는 중요하다고 보았다. 생필적인 소유에 대한 것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없는 소유는 불안감만 줄 뿐,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과 불안을 해소해 주지는 못한다.
반면에, 존재적 실존 양식은 그렇지 않다. 소유에서 벗어나 세계와 하나가 되는 방식이다. 존재적 실존 양식은 소유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세계와 이어지는 방식이라서 고독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고, 행복에 이를 수 있게 한다.
존재적 실존 양식은 소유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세계와 이어지는
방식이라서 고독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고,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양식에 의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아보기로 한다.
목표가 선명하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만 프롬이 제안한 방법은 바로,
시를 읽는 것으로 인해 어떻게 세계와 나라는 존재가 합일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 원리와 과정에 대해 필자가 추론해 보았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문자를 읽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시에 담긴 문화와 정신을 읽어내고 떠올릴 수 있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시를 읽는 독자는 능동적인 자아 주체성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능동적 내면을 갖게 되는 것이 바로 행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시를 읽으려면 이성적으로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이다. 시를 통해 능동적 내면을 갖게 된 자아는 자신과 세계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소유로 인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세 된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과 동일한 성향을 지녔을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이 좋아지고, 타인에게 호의적이 된다. 타인을 사랑하고 나누는 과정에서 다른 존재의 성장을 돕게 되고, 이러한 삶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행복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간략히 요약해 보면 이렇다.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자본주의적 현대사회의 병폐와 자극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소비와 탐욕이라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능동적 주체적 자아를 갖게 되어
타인과 감정을 나누며 세계와 합일이 되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시를 안 읽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도 시 한 편 마음에 새기면서
행복한 삶에 이르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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