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낭송하기에 좋은 시를 고르는 방법
시낭송하기 좋은 시는 어떤 시일까?
물론 세상의 모든 언어는 맥락이라는 조건에 의해 다르게 해석이 되기 때문에, 누가 어디에서 어떤 맥락으로 낭송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전달이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낭송하기에 좋은 시가 따로 있다.
그 중 몇 가지 기준으로만 살펴 보도록 하겠다. 단, 시샘의 주관적 견해라는 점 참고하기 바란다.
1. 주제면에서
다소 상투적인 면이 있으나, 낭송하기에는 그래도 교훈적인 것이 좋다. 철학적이고 불확실한 것보다는 뚜렷하게 주제가 드러나는 것이 좋다. 소리로 듣기만 하는 것은 발음의 유사성 등으로 인해서 문자보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 놓쳤던 것, 반성하는 것 등을 다룬 주제가 좋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는 내용이라면, 감동하는 청중의 폭도 넓기 때문이다. 식상하거나 상투적일 수 있다. 따라서 청중의 이해 수준이나 낭송하는 현장의 상황에 따라 시를 다르게 선별해야 할 것이다. 시에 대한 이해가 높은 청중인지, 집중하는 공간인지에 따라 다르게 선택하면 된다.
2. 형식면에서
다소 긴 시가 좋다. 통상적으로 시낭송은 3분 이내를 기준으로 한다. 시가 지나치게 짧으면 청중이 들을 준비가 되기도 전에 시가 끝나버릴 수도 있다. 3분 내에 낭송하기 좋은 분량은 원고지 기준으로 800자 내외의 분량이다. 일반적인 스피치에서는 3분 기준 1200자 내외인데, 낭송의 경우에는 그보다 훨씬 느리게 낭송하기 때문에 800자를 넘지 않는 것이 감성을 살리면서 낭송하기에 좋다. 행의 길이로는 20행 이상인 시를 권장한다.
3. 어휘
낭송하기에 좋은 어휘는 묘사보다는 설명이, 구체어보다는 관념어가 많은 시이다. 묘사나 구체어는 생각을 하고 이미지를 그려야 하는데, 시낭송가가 낭송하는 그 짧은 순간에 청중이 묘사한 이미지를 그려내거나 구체적인 물체를 상상해 내는 것이 쉽지 않다. 따라서 직설적으로 풀어서 설명을 해 주는 직시적인 어휘를 많이 사용한 시가 낭송하기에 적합하다. 짧은 수필 같은 시가 낭송하기에 적합하다.
4. 문체
서술체나 고백체는 잔잔하고 내밀한 느낌이고, 설의적이거나 감탄적 문체를 사용하면, 격앙된 느낌이 든다. 청유나 명령형 문체를 사용할 경우에는 선언적이고 강한 느낌이 든다.
5. 고전시가 낭송하기
고전 시 중에서도 좋은 시가 많다. 다만 고전 시가의 경우 고전 원문을 그대로 낭송하게 되면 청자가 이해하기 어렵다. 고전시가를 낭송할 때에는 가능하면 현대어로 번역을 하여 낭송하는 것을 추천한다. 만약 고전의 원문을 그대로 낭송하고자 할 경우라면 한 행씩 번갈아 가면서 한 행은 원문을 낭송하고 이어서 현대어로 해석하여 낭송하는 방식을 권한다. 고전 시가의 옛말이 갖는 아름다움도 느끼면서 시의 해석을 동시에 전달하는 방식이다. 규정이 딱딱한 시낭송 현장이라면, 미리 이러한 방식의 시낭송이 허용이 되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다.
6. 외국시 낭송하기
외국시도 좋은 시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외국시의 경우에는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시가 갖는 의미가 다소 무의미해지거나 약해지는 경우가 많다. 의미 전달이 잘 될 수 있는 번역본을 잘 찾아야 한다. 외국시의 경우 원어로 먼저 이해하고 난 후에 번역한 언어로 연습해 둘 것을 권장한다.
다음은 시낭송 공연을 할 때 자주 낭송하는 시 14편을 모아 보았다.
<<하나>>
우리들 마음속에/#문정희
빛은 해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그대 손을 잡으면
거기 따뜻한 체온이 있듯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있는
사랑의 빛을 나는 안다
마음속에 하늘이 있고
마음속에 해보다 더
눈부시고 따스한 사랑이 있어
어둡고 추운 골목에는
밤마다 어김없이 등불이 피어난다
누군가는 세상은 추운
곳이라고 말하지만
또 누군가는 세상은
사막처럼 끝이 없는
곳이라고 말하지만
무거운 바위틈에서도 풀꽃이 피고
얼음장을 뚫고도 맑은 물이 흐르듯
그늘진 거리에 피어나는
사랑의 빛을 보라
거칠은 산등성이를
어루만지는 따스한 손길을 보라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하늘
해보다 눈부시고 따스한 빛이 아니면
어두운 밤에 누가 저 등불을 켜는 것이며
세상에 꿈을 가져다 주리
<<둘>>
목화는 두 번 꽃이 핀다/박노해
꽃은
단 한번 핀다는데
꽃 시절이 험해서
채 피지 못 한 꽃들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꽃잎 떨군 자리에
아프게 익어 다시 피는 목화꽃
한 생에 두 번 꽃이 핀다네
봄날 피는 꽃만이 꽃이랴
눈부신 꽃만이 꽃이랴
꽃 시절 다 바치고 다시한번
앙상히 말라가는 온몸으로
남은 생 을 다 바쳐 피워 가는 꽃
슬프도록 환한 목화꽃이여
이 목숨의 꽃 바쳐
세상이 따뜻하다면
그대 마음도 하얀 솜꽃처럼
깨끗하고 포근하다면
나 기꺼이 밭둑에 쓰러지겠네
앙상한 뼈마디로 메말라 가며
순결한 솜 꽃 피워 바치겠네
춥고 가난한 날의
그대 따스하라
<<셋>>
마음이 아름다우니 세상이 아름다워라/#이채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이 없고
곱게 보면 꽃 아닌 사람이 없으되
내가 잡초 되기 싫으니
그대를 꽃으로 볼 일이로다
털려고 들면 먼지 없는 이 없고
덮으려고 들면 못 덮을 허물 없으되
누구의 눈에 들기는 힘들어도
그 눈 밖에 나기는 한순간이더라
귀가 얇은 자는
그 입 또한 가랑잎처럼 가볍고
귀가 두꺼운 자는
그 입 또한 바위처럼 무거운 법
생각이 깊은 자여!
그대는 남의 말을 내 말처럼 하리라
겸손은 사람을 머물게 하고
칭찬은 사람을 가깝게 하고
넓음을 사람을 따르게 하고
깊음은 사람을 감동케 하니
마음이 아름다운 자여!
그대 그 향기에 세상이 아름다워라
<<넷>>
영혼의 향기로 사랑하여라/#장시하
그대여 영혼의 향기로 사랑한 적 있는가.
사랑하면 할수록 영혼의 향기가
그윽해 짐을 느껴 본 적 있는가.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
영혼의 향기가 다름을 느껴 본 적 있는가.
영혼의 향기가 말하는 소리에
귀 기울려 본 적 있는가.
그대 가슴에 난 영혼의 귀로 소리를 들어보라.
그대 가슴에 난 영혼의 코로 향기를 맡아보라.
영원히 시들지 않고
마르지 않는 영혼의 향기를...
육체의 향기로 나눈 사랑,
그 육신의 옷 벗으면 끝나지만
머리로 나눈 사랑,
언젠가는 희미하게 지워지지만
가슴으로 나눈 사랑, 영원히 시들지 않고
마르지 않음을 아는가.
어떤 사람 살며 한 번도
영혼의 소리 못 듣고
어떤 사람 살며 한 번도
영혼의 향기 못 맡고
세상 옷을 훌훌 벗어버리지만....
그대여 영혼의 향기로 사랑하여라.
영원히 시들지 않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
가슴으로 사랑 하여라.
세상 끝 넘어가도 변치 않는
영혼의 향기로 사랑하여라
<<다섯>>
저 거리의 암자 /#신달자
어둠 깊어가는 수서역 부근에는
트럭 한 대분의 하루 노동을 벗기 위해
포장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이 함께
야간 여행을 떠납니다
밤에서 밤까지 주황색 마차는
잡다한 번뇌를 싣고 내리고
구슬픈 노래를 잔마다 채우고
빗된 농담도 잔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속풀이 국물이 짜글짜글 냄비에서 끓고 있습니다
거리의 어둠이 짙을수록
진탕으로 울화가 짙은 사내들이
해고된 직장을 마시고 단칸방의 갈증을 마십니다
젓가락으로 집던 산 낙지가 꿈틀 상 위에 떨어져
온몸으로 문자를 쓰지만 아무도 읽어 내지 못합니다
답답한 것이 산 낙지뿐입니까
어쩌다 생의 절반을 속임수에 팔아 버린 여자도
서울을 통째로 마시다가 속이 뒤집혀 욕을 게워 냅니다
비워진 소주 병이 놓인 플라스틱 작은 상이 휘청거립니다
마음도 다리도 휘청거리는 밤거리에서
조금씩 비워지는
잘 익은 감빛 포장마차는 한 채의 묵묵한 암자입니다
새벽이 오면
포장마차 주인은 밤새 지은 암자를 거둬 냅니다
손님이나 주인 모두 하룻밤의 수행이 끝났습니다
잠을 설치며 속을 졸이던 대모산의 조바심도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거리의 암자를 가슴으로 옮기는 데
속을 쓸어내리는 하룻밤이 걸렸습니다
금강경 한 페이지가 겨우 넘어갑니다.
<<여섯>>
작은 이름 하나라도/#이기철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 때 너무 멀어서 못 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 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다듬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 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밥, 한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안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
<<일곱>>
인연서설/#문병란
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
물을 찾는 뿌리를 안으로 감춘 채
원망과 그리움을 불길로 건네며
너는 나의 애달픈 꽃이 되고
나는 너의 서러운 꽃이 된다
사랑은 저만치 피어 있는 한 송이 풀꽃의 애틋한 몸짓
서로의 빛깔과 냄새를 나누어 가지며
사랑은 가진 것 하나씩 잃어 가는 일이다
각기 다른 인연의 한 끝에 서서
눈물에 젖은 정한 눈빛 하늘거리며
바람결에도 곱게 무늬지는 가슴
사랑은 서로의 눈물 속에 젖어 가는 일이다
오가는 인생 길이 애틋이 피어났던
너와 나의 애달픈 연분도
가시덤불 찔레꽃으로 어우러지고
다하지 못한 그리움
사랑은 하나가 되려나
마침내 부서진 가슴 핏빛 노을로 타오르나니
이 밤도 파도는 밀려와
잠 못 드는 바닷가에 모래알로 부서지고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가는 일이다
<<여덟>>
치자꽃 설화/#박규리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 문 하나만 열어 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 2004년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 (창비)
<<아홉>>
그대는 나의 가장 소중한 별/#김소엽
그대의 따뜻한 눈빛 한 올이 별이 되고
그대의 다정한 미소 한 자락이 꽃이 되고
그대의 부드러운 말 한 마디가 이슬 되어
내 인생길을 적셔주고 가꾸어 준
그대여,
이제 마지막 종착역도 얼마 남지 않았거니
서럽고 아프고 쓰라린 기억일랑
모래바람에 날려보내고
아름답고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만을
찬란한 별로 띄우자
내가 외롭고 아프고 슬플때
그대가 나의 소중한 별이 되어 준 것처럼
나도 그대의 소중한 별이 되어 주마
이 세상 어딘가에 그대가 살아있어
나와 함께 이 땅에서 호홉하고 있는
그대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나는 고맙고 행복하나니
그대는 나의 가장 소중한 별
그대는 나의 가장 빛나는 별
[출처] 그대는 나의 가장 소중한 별
<<열>>
작은 것을 위하여 / #김기철
굴뚝새들은 조그맣게 산다
강아지풀 속이나 탱자나무 숲 속에 살면서도 그들은 즐겁고
물여뀌 잎새 위에서도 그들은 깃을 묻고 잠들 줄 안다
작은 빗방울 일부러 피하지 않고
숯더미 같은 것도 부리로 쪼으며 발톱으로 어루만진다
인가에서 울려 오는 차임벨 소리에 놀란 눈을 뜨고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에 가슴은 떨리지만
밤과 느릅나무 잎새와 어둠 속의 별빛을 바라보며
그들은 조용한 화해와 순응의 하룻밤을 새우고
짧은 꿈속에 저들의 생애의 몇 토막 이야기를 묻는다
아카시아꽃을 떨어뜨리고 불어온 바람이 깃털 속에 박히고
박하꽃 피운 바람이 부리 끝에 와 머무는 밤에도
그들의 하루는 어둠 속에서 깨어나 또 다른 날빛을 맞으며
가을로 간다
여름이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들녘 끝에
개비름꽃 한 점 피웠다 지우듯이
가을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산기슭 싸리나무 끝에
굴뚝새들의 단음의 노래를 리본처럼 달아둔다
인간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하는 동안에도
인간 다음에 이 지상에 남을 것들을 위하여
굴뚝새들은 오리나무 뿌리 뻗는 황토 기슭에
그들의 꿈과 노래를 보석처럼 묻어 둔다
<<열 하나>>
길/ #김기림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져*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낡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열 둘>>
누가 말했을까요/ #천양희
누가 말했을까요
살아 있는 것처럼 완벽한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 하나의 생명일 때 기쁘고 기쁨은 곧
마음의 길을 열어 숨은 얘기 속삭인다는 것을
여린 잎 속의 푸른 벌레와 생각난 듯이 날리는 눈발과
훌쩍거리며 내리는 비가
얼마나 기막힌 눈(目) 이라는 것을
그토록 작은 것들이 세상을 읽었다는 것을
누가 말했을까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하나의 자연일 때 편하고 편함은 곧
마음의 길을 열어 숨은 얘기 속삭인다는 것을
뒤꼍의 대나무 숲 바람 소리와 소리 없이 피는 꽃잎과
추위에 잠 깬 부엉이 소리가
얼마나 기막힌 소리인가를
그토록 작은 것들이 세상을 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보았다는 것을
하늘이 텅 비어 있었다는 것을
<<열 셋>>
저녁 강물에/#박이도
저녁 강물이
말없이 흘러가듯
세월의 한때가
또 사라지는가
하루같이
삼백 예순다섯 날을 스쳐왔다
노래하듯 즐거운 날이
기도하듯 두려움과 기원의 날이
오늘 아침
낙엽처럼 뒹구는
한 조각 빛바랜 꿈으로
흐트러지고 있다
해가 지는가
부챗살처럼 펼쳐지는
기대와 꿈의 햇살이
서산에 기울어지고
우리의 모두는 저마다의 집으로
황망히 돌아가는가
출발하고도 도달하는
시간의 여정 속에
지금은 가슴 저미어
지나온 먼데를 뒤돌아본다
미움과 싸움의 나날
오늘,
나는 그 모두와 결별해야겠다
어둠 속 소리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생각하듯
지나간 세월을 등지고
진정,
조용히 울어보고 싶다
그리고
불끈 두 주먹에 힘주어
내일을 기약해야겠다
<<열 넷>>
자화상/#유안진
한 오십년 살고보니
나는 나는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라
눈과 서리와 비와 이슬이
강물과 바닷물이 뉘기 아닌 바로 나였음을 알아라
수리부엉이 우는 이 겨울도 한밤중
뒷뜰 언 밭을 말달리는 눈바람에
마음 헹구는 바람의 연인
가슴속 용광로에 불지피는 황홀한 거짓말을
오오 미쳐볼 뿐 대책없는 불쌍한 희망을
오오 미쳐볼 뿐 대책없는 불쌍한 희망을
내 몫으로 오늘 몫으로 사랑하여 흐르는 일
삭아질수록 새우젓갈 맛 나듯이
때 얼룩에 쩔을 수록 인생다워지듯이
산다는 것도 사랑한다는 것도
때묻히고 더럽혀지며
진실보다 허상에 더 감동하며
정직보다 죄업에 더 집착하며
어디론가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다
나란히 누웠어도 서로 다른 꿈을 꾸며
끊임없이 떠나고 떠도는 것이다
멀리 멀리 떠나갈수록
갈 데까지 갔다가는 돌아오는 것이다
하늘과 땅만이 살 곳은 아니다
허공이 오히려 살 만한 곳이며
떠돌고 흐르는 것이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다
돌아보지 않으리
문득 돌아보니
나는 나는 흐르는 구름의 딸이요
떠도는 바람의 연인이라
#시낭송하기좋은시14편모음 #시낭송하기좋은시선별하기 #시낭송하기좋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