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YK의 책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by 이영근

식생활의 변화


비벌리힐스에 사는 부자들은 양상추 샐러드와 퀴노아를 곁들인 찐 두부를 먹는 반면, 빈민가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트윙키 케이크, 치토스, 햄버거, 피자를 배 터지게 먹는다.

2014년에 21억 명 이상이 과체중이었던 반면, 영양실조를 겪는 사람은 8억 5,000만 명이었다.

2030년에는 인류의 절반이 과체중일 것으로 예상된다.

2010년에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이 총 100만 명 정도였던 반면, 비만으로 죽은 사람은 300만 명이었다.



행복에 관하여


생명과학에 따르면, 행복과 고통은 단지 그 순간에 어떤 신체 감각이 우세한가의 문제이다.

우리는 외부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에 반응할 뿐이다.

사람들은 실직해서, 이혼해서, 전쟁이 일어나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몸에서 일어나는 불쾌한 감각이다.

실직이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지만, 우울증 자체는 일종의 불쾌한 신체 감각이다.

우리는 수천 가지 이유로 화를 내지만 화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다.

화는 항상 열이나 긴장 같은 감각을 통해 일어나고, 그런 감각이 화를 솟구치게 만든다.

우리가 열불 난다고 표현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거꾸로, 과학에 따르면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은 승진하고, 복권에 당첨되고, 진정한 사랑을 찾아서가 아니다.

오직 하나, 몸에서 일어나는 유쾌한 감각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2002년 월드컵 한국의 4강 진출 역시 황홀한 기억도 시청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환호성 때문이 아니라 몸안에 휘몰아치는 감각의 폭풍에 반응했던 것이다.


모두 진화 탓이다.

우리의 생화학적 기제는 수없이 많은 세대를 거쳐오면서 생존과 번식의 기회를 늘리기 위해 적응했을 뿐, 행복을 위해 적응하지 않았다.

우리의 생화학적 기제는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유쾌한 감각으로 보상한다. 하지만 이러한 감각은 얄팍한 상술일 뿐이다.

우리는 배가 고픈 불쾌한 느낌을 피하고 기분 좋아지는 맛과 황홀한 오르가슴을 즐기기 위해 음식과 연인을 필사적으로 찾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맛과 황홀한 오르가슴은 얼마 못 가고, 그런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다면 더 많은 음식과 연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어쩌면 행복의 열쇠는 경기도 금메달도 아닌, 흥분과 평안의 황금 배합 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트레스와 따분함 사이를 오가며 이래도 불만, 저래도 불만인 상태로 살아간다.



마음은 감각과 감정의 알고리즘이다.


마음은 고통, 쾌락, 분노, 사랑 같은 주관적 경험의 흐름이다.

이런 마음의 경험들은 서로 연결된 감각, 감정, 생각들로 구성되고, 잠시 깜빡였다 금방 사라진다.

그런 다음 다른 경험들이 순간적으로 일어나 깜박였다가 사라져 간다.

(우리는 감각, 감정 생각 같은 독자적 범주로 분류하려 하지만, 사실 이것들은 한데 섞여 있다.)


이렇게 마구 뒤섞인 경험들이 모여 의식의 흐름을 구성한다.

불멸의 영혼과 달리 마음은 여러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고 항상 변하며, 영구적이라고 생각할 근거가 전혀 없다.

영혼이라는 것은 인정하는 사람도 있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하나의 설이다.

반면 의식의 흐름은 우리가 매 순간 직접 목격하는 구체적 실제이다.

의식은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다. 당신은 의식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다.

우리가 의심에 사로잡혀 주관적 경험이 정말 존재할까?라고 자문할 때조차 우리는 우리가 의심을 경험하고 있음을 안다.


마음의 흐름을 구성하는 의식적 경험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모든 주관적 경험에는 기본적인 특징 두 가지가 있다. 바로 감각과 욕망이다.

로봇과 컴퓨터는 의식이 없다. 왜냐하면 수많은 능력을 갖추었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것도 갈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봇에는 에너지 센서가 장착되어 있어서, 배터리가 다 되면 센서가 중앙처리장치로 신호를 보낸다. 그러면 로봇이 콘센트로 이동해 플러그를 꽂고 배터리를 충전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로봇은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는다.

반면 인간은 에너지가 고갈되면 허기를 느끼고 그 불쾌한 감각이 멈추기를 바란다.

인간은 의식적인 존재이고 로봇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배가 고파 쓰러질 때까지 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범죄인 반면 배터리가 나갈 때까지 로봇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아닌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면 동물은 어떨까? 동물에게도 의식이 있을까? 그들도 주관적인 경험을 할까? 지쳐 쓰러질 때까지 말에게 일을 시켜도 괜찮을까?

앞서 지적했듯이, 현재 생명과학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포유류와 조류, 적어도 일부 파충류와 어류가 감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최신 이론들은 감각과 감정이 데이터를 처리하는 생화학적 알고리즘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마음과 의식에 관한 오늘날 정설은 뇌의 전기화학적 반응에 의해 의식이 생기고, 마음의 경험들은 어떤 필수적인 데이터 처리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뇌에서 일어나는 일군의 생화학적 반응과 전휴가 어떻게 고통이나 분노, 또는 사랑을 같은 주관적 경험을 만들어 내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마 10년 내지 50년 안에 확실한 설명이 나올 것이다.



경험과 감수성


경험이란 정확히 무엇을 말할까? 경험적 데이터는 아니다.

경험은 원자, 전자기파, 단백질, 숫자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경험은 세 가지 주요 성분인 감각, 감정, 생각으로 이루어진 주관적 현상이다.

특정 순간의 내 경험은 내가 감각하는 모든 것(열, 쾌락, 긴장 등),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사랑, 두려움, 분노 등), 내 마음속에 떠 오른 모든 생각으로 구성된다.


그러면 감수성은 무엇일까? 두 가지를 뜻한다.

첫째는 감각, 감정, 생각에 주목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 감각, 감정, 생각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지나가는 모든 산들바람에 흔들려선 안 된다 그러나 새로운 경험에 항상 열려 있어야 하고, 그 경험들로 인해 내 견해와 행동은 물론 성격에 일어나는 변화까지 받아들여야 한다.

경험과 감수성은 끝없는 고리로 이어져 서로를 강화한다.

감수성 없이는 어떤 것을 경험할 수 없고, 다양한 경험을 하지 않으면 감수성을 개발할 수 없다.

감수성은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어서 키울 수 있는 추상적인 소질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사용해야만 무르익고 성숙하는 실용적 기술이다.



나는 내 욕망을 선택하지 않는다.


사람들을 거대한 뇌 스캐너에 넣고 양손에 스위치를 하나씩 쥐게 했다.

그리고 내킬 때마다 두 스위치 중 하나를 누르라고 했다.

피실험자가 실제로 행동을 하기도 전에, 심지어 자신의 의향을 자각하기도 전에 과학자들은 피실험자의 뇌신경 활성을 보고 어떤 스위치를 누를지 예측할 수 있었다.

피실험자가 자신의 선택을 인지하기 영 점 몇 초 내지 몇 초 전에 피실험자의 결정을 알려주는 뇌신경 활성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오른쪽 스위치나 왼쪽 스위치를 누르는 결정은 피실험자의 선택을 반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자유의지의 존재를 믿는 것은 잘못된 논리 때문일 것이다.

어떤 생화학적 연쇄반응이 오른쪽 스위치를 누르고 싶게 만들 때 나는 실제로 오른쪽 버튼을 누르고 싶다고 느낀다. 여기까지는 사실이다.

나는 정말로 그 버튼을 누르고 싶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그 스위치를 누르고 싶다면 그 소망은 내 선택이라는 결론으로 논리적 비약을 감행한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내 욕망을 선택하지 않는다. 단지 그 욕망을 느끼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생명과학의 3가지 주장


1. 유기체는 알고리즘이고, 인간은 분리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다.

즉 인간은 여러 알고리즘들의 집합으로, 단일한 내적 목소리 또는 단일한 나는 없다.

2. 인간을 구성하는 알고리즘들은 자유롭지 않다.

이 알고리즘들은 유전자와 환경의 영향을 받고, 자유의지가 아니라 결정론적으로 또는 무작위적으로 결정을 내린다.

3. 앞의 두 전제로부터, 이론상으로 외부의 어떤 알고리즘이 나보다 나 자신에 대해 훨씬 더 잘 안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내 몸과 뇌를 구성하는 시스템 각각을 관리 감독하는 알고리즘은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런 알고리즘이 개발되면 유권자, 고객, 보는 사람의 눈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알고리즘이 가장 잘 알고, 알고리즘이 항상 옳고, 알고리즘의 계산에 아름다움이 달려 있게 될 것이다.



외도와 인본주의


1300년 잉글랜드 소도시에서 유부녀가 이웃 남자를 좋아해 그와 성관계를 가졌다고 가정해보라.

살그머니 집으로 돌아와 웃음을 감추고 구겨진 옷을 펼 때 그녀의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이게 뭐지? 왜 그랬지? 잘한 걸까? 잘못한 걸까?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 또 해도 될까?' 이런 질문들의 답을 찾으려면 이 여자는 신부를 찾아가 고백하고 지도를 부탁해야 했다.

신부는 성경에 조예가 깊었고 성스러운 텍스트에는 신이 간통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와 있었다.

신부는 영원불변하는 신의 말씀에 따라, 그녀가 큰 죄를 범했으며 행실을 고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거라고 분명하게 말해줄 수 있었다.

그녀는 당장 회개하고, 곧 있을 십자군 전쟁에 금화 열 닢을 기부하고, 향후 6개월 동안 고기를 먹지 않고, 캔터베리에 있는 성 토머스 베켓의 무덤으로 순례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다시는 그 끔찍한 죄를 되풀이하면 안 되었다.


오늘날은 상황이 매우 다르다.

수백 년 동안 인본주의는 우리가 의미의 최종 원천이고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의지가 최고의 권위라고 설파해왔다.

어떤 외적 실체가 뭐가 뭔지 알려줄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자신의 느낌과 욕망에 의지하면 된다.

우리는 유아기부터 인본주의 슬로건의 포화를 맞는다.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라. 자신에게 충실해라 자신을 믿어라 마음 가는 행동 해라.”

장 자크 루소는 18세기의 감정 바이블이라 할 만한 소설 <에밀>에 이 모든 것을 요약해놓았다.

인생을 사는데 필요한 규칙들을 자연이 남긴 글에서 찾았으며, 그 글자들은 어떤 것으로도 지울 수 없도록 마음속 깊게 새겨져 있다고 주장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는 오직 나 자신하고만 의논하면 된다.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이 좋고 나쁘다고 느끼는 것이 나쁜 것이다."

따라서 현대 여성은 혼외정사를 이해할 때 신부나 오래된 책의 심판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그녀는 감정을 주의 깊게 살필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잘 모르겠으면 한 친구에게 전화해 카페에서 만나자고 한 다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것이다.

그래도 분명하지 않으면 심리치료사를 찾아가 모든 것을 말할 것이다.


한 여성을 한 남자의 품으로 내몰았던 감정이 다른 남자의 품으로 내몰았다면 그 여성은 무엇을 잘못한 것인가?

20년을 함께한 배우자가 만족시켜 주지 못한 감정적, 성적 욕구를 외도로 풀 수 있다면, 게다가 새로운 연인이 자상하고 열정적인 데다 상대방의 요구를 잘 헤아린다면, 왜 그것을 즐기면 안 되는가?

당신은 그 일과 관련된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연인이야 당연히 서로의 품 안에서 행복하겠지만, 각자의 배우자들은 끔찍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게다가 이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자식들은 수십 년 동안 상처를 안고 살아갈 것이다.

설령 외도가 발각되지 않더라도 엄청난 긴장이 따를 것이고, 따라서 소외감과 반감을 키우게 될 것이다.


인본주의 윤리에서 흥미로운 건 이처럼 인간의 감정이 충돌하는 것이다.

똑같은 행동을 어떤 사람은 좋게 어떤 사람은 나쁘게 느낀다면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 어떻게 결정할까?

두 연인의 좋은 감정이 그들의 배우자와 자녀들이 느끼는 나쁜 감정보다 더 가치 있을까?


인본주의는 어떤 일이 누군가에게 나쁜 감정을 일으킬 경우에만 나쁘다고 가르쳐왔다.

살인이 나쁜 것은 신이 “너희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 아니다.

살인이 나쁜 것은 피해자와 그 가족, 친구와 지인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도둑질이 나쁜 것은 고대문서에 “너희는 남의 것을 훔쳐서는 안 된다”라고 적혀 있기 때문이 아니다.

도둑질이 나쁜 것을 재산을 잃으면 기분이 나쁘기 때문이다.

어떤 행동이 누구의 기분도 상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 행동은 문제 될 것이 없다.



인간과 가축(돼지)


인간이 관리하는 농장에 사는 수퇘지, 암퇘지, 새끼 돼지들의 삶도 정확히 똑같은 진화 논리의 지배를 받는다.

그들의 조상은 야생에서 생존하고 번식하기 위해 광대한 영역을 배회하고, 주변 환경을 익히고, 덫과 포식자를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동료 멧돼지들과 의사소통하고 협력할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늙고 경험 많은 우두머리 암컷이 지배하는 복잡한 사회집단을 이루살았다.

그러한 필요에 부응해 야생 멧돼지들은(그리고 야생 암퇘지들은 더더욱) 똑똑한 사회적 동물이 되었다. 그들은 호기심이 많으며, 여럿이 어울리고 장난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주위를 탐색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어떤 암퇘지가 희귀한 돌연변이로 인해 자신의 환경과 주변 멧돼지들에게 무관심했다면 아마 생존하거나 번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야생 멧돼지의 후손들인 가축화된 수퇘지들은 조상의 지능, 호기심, 사회생활 능력을 물려받았다.

가축화된 돼지들도 야생 멧돼지와 마찬가지로 매우 다양한 음성 및 후각 신호를 이용해 의사소통을 한다.

어미 돼지들은 새끼들이 끽끽거리는 소리를 구별하며, 새끼 돼지들은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어미의 신호음과 다른 암퇘지들의 신호음을 구별한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의 스탠리 커티스 교수는 햄릿과 오믈렛이라는 이름의 두 마리 돼지에게 특수한 조이스틱을 주둥이로 제어하는 훈련을 시킨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돼지들이 간단한 컴퓨터 게임을 영장류만큼이나 잘 배운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오늘날 공장식 축산 농장에 사는 대부분의 암퇘지들은 컴퓨터 게임은커녕, 가로 2미터 세로 60센티미터의 작은 생식 우리에 갇혀 지낸다.

바닥은 콘크리트이고 금속 울타리로 둘러싸인 생식 우리는 새끼를 밴 암퇘지들이 걷기는커녕 몸을 돌리거나 옆으로 눕기도 힘들 만큼 좁다.

이런 환경에서 석 달 반을 지낸 뒤, 그 암퇘지들은 약간 더 넓은 우리로 옮겨져 새끼를 낳고 젖을 먹인다.

자연 상태에서 새끼 돼지들은 10주 내지 20주쯤 젖을 먹지만, 공장식 농장에서는 2주에서 4주 만에 강제로 젖을 떼고 어미에게서 분리되어 다른 곳으로 보내진 뒤 통통하게 살이 오르면 도축된다.

어미는 금방 다시 임신해 생식 우리에서 같은 생활주기를 반복한다.

보통 암퇘지는 다섯 번에서 열 번 정도 그런 주기를 반복한 뒤 도축된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 암퇘지는 주변을 탐색할 필요도, 다른 돼지들과 어울릴 필요도 새끼와 유대를 형성할 필요도, 심지어 걸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돼지의 주관적 관점에서 보면 그 돼지는 여전히 이 모든 것에 매우 강한 욕구를 느끼고, 그런 욕구들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엄청난 고통을 받는다.

생식 우리에 갇힌 암퇘지들은 흔히 극심한 좌절과 지

독한 절망을 번갈아 드러낸다.

생존과 번식에는 불필요하다 해도, 그 동물의 주관적 관점에서는 수천 세대 전에 형성된 필요를 계속 느낀다는 것, 이것이 진화 심리학이 주는 교훈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농업혁명은 동물들의 주관적 필요를 무시하면서도 그들의 생존과 번식을 확보할 수 있는 힘을 인간에게 주었다.


대부분의 농경사회에서 사람들은 과연 어떤 취급을 받았던가?

성경시대 이스라엘 또는 중세 중국에서 인간을 매질하고 노예로 부리고 고문하고 처형하는 일은 흔했다.

인간은 단순히 재산으로 여겨졌다.

통치자들은 농부들에게 의견을 물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고, 농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신경 쓰지도 않았다.

부모들이 자식들을 노예로 팔거나, 가장 높은 가격을 쳐주는 사람과 결혼시키는 일도 흔했다.

그런 조건에서 돼지의 감정을 무시하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2


고대 이집트와 로마제국 또는 중세 중국에서는 돼지, 젖소, 닭 들은 이 집 저 집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쓰레기 더미와 근처 숲에서 먹을 것을 찾았다.

그때 욕심 많은 농부가 동물 수천 마리를 좁은 우리에 가두려 했다면, 아마 치명적인 유행병이 발생해 모든 동물들뿐 아니라 마을 사람 대다수가 떼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과학이 유행병, 병원균, 항생제의 비밀을 해독해 내자, 공장식 닭장, 축사 양돈장은 실현 가능한 일이 되었다.

지금은 몇 줄로 배열된 비좁은 우리에 수만 마리의 돼지, 젖소, 닭을 넣고 예방접종, 약물, 호르몬 요법, 제초제, 중앙집중식 에어컨, 자동 먹이 공급기의 도움을 받아 고기, 우유, 달걀을 엄청나게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재고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관행들이 점점 비판받는 추세이다.

우리가 이른바 하등 한 생명체들의 운명에 갑자기 전례 없는 관심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그들과 우리가 곧 운명 공동체가 될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초인적 지능과 전에 없던 성능을 갖추면 우리는 그런 프로그램들의 가치를 인간의 가치보다 더 높이 평가해야 할까?

인공지능이 스스로의 필요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인간을 착취하고 심지어 죽여도 괜찮을까?

아무리 뛰어난 지능과 성능을 가진 컴퓨터라고 해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면, 인간이 돼지를 착취하고 죽이는 것은 윤리적인가?

인간은 더 높은 지능과 더 강한 능력에 더하여 돼지, 닭, 침팬지, 컴퓨터 프로그램과 구별되게 해주는 마법의 광휘라도 갖고 있는가?

갖고 있다면 그 광휘는 어디서 오는 것이며, 인공

지능이 그런 광휘를 획득하지 못한다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반대로 그런 광휘가 없다면, 컴퓨터가 지능과 성능에서 인간을 앞선 뒤에도 계속해서 인간의 생명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할 이유가 있을까?

우리의 지능과 능력을 그토록 막강하게 만드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 이외의 존재들이 인간과 같아지거나 인간을 능가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 것인가...



* 지극히 개인적인 정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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