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여행자도 박싱 데이는 궁금하다
처음 경험해 보는 박싱 데이(Boxing day).
가난한 여행자이지만 박싱데이 자체의 분위기가 궁금해서 퀸 빅토리아 빌딩에 가보기로 했다.
퀸 빅토리아 빌딩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쇼핑몰 중 하나로 꼽힐정도로 시드니의 명소 중 하나라는데
한국에서도 쇼핑을 즐겨하지 않는 나는 시드니에 머무는 동안 한 번도 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더랬다.
오늘도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아하는 대중교통인 페리를 타고 바랑가루 와프(Barangarro Wharf)에서 서큘러키(Circular quay)로 향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달리다 보면 어느덧 마주하게 되는 하버 브리지와 오페라하우스.
하버 브리지와 오페라하우스를 동시에 한 프레임에 담을 수 있는 찰나에, 셔터를 누르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서큘러 키에서 퀸 빅토리아 빌딩까지는 트램을 이용하였다.
도심을 가로지르던 트램에서 내리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퀸 빅토리아 빌딩의 고풍스러운 외관은 압도적이었다. 이런 곳이 박물관이 아니고 쇼핑몰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박싱데이에 걸맞게, 퀸 빅토리아 빌딩의 매장 안과 밖은 쇼핑하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한국보다 많이 저렴하다는 UGG 매장에 가볍게 구경이나 해볼까 싶어 들어갔더니
매장 안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한국어로 안내하는 직원분과 한국어로 사이즈를 문의하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여기가 한국인지 호주인지 헷갈려 웃음이 나왔다.
물건을 살 계획도 없던 나는, 괜히 이것저것 묻는 게 오히려 민폐가 아닐까 싶어 황급히 매장을 도로 빠져나왔다.
차라리 쇼핑에 투자할 시간과 돈으로 맛있는 커피를 한잔 먹겠어!
그래서 찾아간 커피맛집, Leible coffee.
한국에선 우유가 들어간 커피만 마시면
하루 종일 속이 메스꺼워서 늘 아메리카노만 고집했었는데,
이상하게도 호주의 라테는 다르다.
남편이 인생라테라고 권해준 이후로, 호주에서는 계속 라테를 마시는 중이다.
앉을자리가 부족했던 작고 아담한 카페 Leible에서 쇼핑보다 더 귀한 커피를 마신 후,
시내에 나온 김에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어 했던 Dymocks 서점에 들렀다.
이 서점의 지하 1층 전체는 어린이 전용 코너였는데 그 규모가 상당했다.
무더운 여름, 시원한 에어컨이 풀가동되고 사방이 책들로 가득한 이곳은 마치 천국 같았다.
한국에서부터 캐리어 가득 아이들 책을 가져오고,
틈만 나면 커스텀즈 도서관에서 책을 공수하고 있었지만 늘 부족하다고 느끼던 참이었다.
무거운 배낭도 잠시 내려놓고, 우리 가족은 서점의 한켠에 자리를 잡았다.
큰 아이는 한국에서도 영어 원서를 꾸준히 읽어 온터라, 선반에 빼곡하게 꽂혀있는 책들 속에서 익숙한 책을 발견할 때마다 눈을 반짝였다.
"이 작가가 이런 책도 썼었네?"
"이 시리즈 중에 이런 책도 있었네?"
"한국에서는 여기까지만 봤었는데, 새로 나왔나 봐"
책장 사이를 누비며 이리저리 책을 살피던 아이는, 이내 마음에 드는 한 권을 발견하고는 그 책에 푹 빠져 조용히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쁘고 자랑스럽던지
특별한 일정이 없었던 우리는 우리에게 남은 오후 시간 전부를 서점에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