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버른 7&8일 차

호주 오픈에 가다

by 홍유경

테니스의 '테'자도 모르는 나.


대학생 시절, 호주 멜버른에서 한 달간 어학연수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던 일본인, 호주인, 말레이시아인 친구들이 내가 체류하던 기간과

호주오픈 기간이 겹쳤는데도 경기를 보러 가지 않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재미있길래 저런 반응이었을까.

그때는 알 수 없었고,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우리 가족 중 유일하게 테니스 경험이 있던 남편은

우리의 호주 여행이 확정되었을 때

멜버른은 반드시 호주 오픈 기간에 맞춰서 가보고 싶다고 했었다.


우리는 본선 경기 시작과 함께 이틀 연속으로 호주 오픈에 갔다.

전 세계에서 몰려온 어마어마한 인파가 대단했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모든 트램 정거장마다

관광객의 안전과 교통을 통제하기 위한 직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트램은 경기장으로 향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가득 실어 출발했고,

마지막 정거장에서 내리자 경기장으로 향하는 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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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오픈으로 향하는 길


이날 우리는 아무 생가 없이 여느 때처럼 아이들 킥보드를 가져갔는데,

경기장 내 반입이 불가해 유료 짐 보관소에 맡겨야 했다.

다행히 짐 보관소는 입장객들이 길게 줄을 선 오른쪽 부스들 중 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첫날은 가족 모두 그라운드 패스를 끊어

선수들의 연습 경기와 무료입장 가능한 경기를 둘러보았다.

날이 어찌나 더운지 곳곳에 시원한 수증기를 뿜어대는 선풍기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선풍기를 만날 때마다 반갑게 달려가

햇볕에 벌게진 얼굴을 식히고 야무지게 모자를 적셔서 머리에 눌러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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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에 대처하는 호주 오픈


우리는 이날 운이 좋게도 세계 랭킹 2위인 카를로스 알카라스 선수의 연습 경기를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유독 한 코트에 몰려있길래 봤더니 알카라스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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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알카라스 선수의 연습 경기


연습 경기가 끝난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연습이 끝난 후 코트 밖으로 나오는 그의 사인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도 사인을 받고 싶다며 그곳에서 나오질 못하고 한참을 서성였다.

나는 그늘 한점 없는 곳에서 앉아 있는 것도 너무 힘에 겨워

아이들을 데리고 그늘로 피신해 있었더랬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무슨 수로 사인을 받냐면서...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내가 테니스를 전혀 몰랐었고

알카라스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랬지만

아마 지금이었다면 그때의 남편보다 더 열성적으로 사인을 받기 위해 더 열성적으로 줄을 섰을지도 모른다.


아이들과 쉬고 있는데 남편이 환호를 하며 달려온다.

그리고 털어놓는 남편의 영웅담.

수많은 사람들이 알카라스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 "알카라스!" "카를로스!"를 외치며 공을 들이밀었다는데

그 가운데 남편이 큰 목소리로 "Go get the title!!!"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남편의 외침에 알카라스 선수가 남편을 향해 돌아보고는

남편에게 너의 볼을 달라는 제스처를 취한 후 사인을 해줬다고 한다.

아직도 이 사인 공은 우리 집 가보로 남아있다.

20240114_133440.jpg 남편이 받아온 카를로스 알카라스 선수의 사인볼


바로 근처 코트에서는

우리나라 선수 중 유일하게 본선에 진출한 권순우 선수의 연습 경기가 있었다.

연습 경기를 보러 온 모든 한국 사람들에게 일일이 사인을 해주고

함께 사진도 찍어준 친절한 권순우 선수.

우리 가족 모두 권순우 선수의 선전을 진심으로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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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오픈에서 만난 권순우 선수


호주 오픈은 그야말로 축제였다.

각종 음식과 음료를 파는 부스가 즐비했고

어디서나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자리와 잠시 쉬는 동안 아이들이 놀거리들도 준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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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와도 같은 호주 오픈 현장


호주 오픈에는 Ball park라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현장에서 기다렸다가 바로 참여할 수 있는 체험도 있었고

제법 시간이 소요되는 프로그램은 QR로 예약을 한 후 참여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40분 여분 간 소요되는 테니스 일일 체험을 예약해서 참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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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 park에서 일일 테니스 체험에 참여한 아이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무더위가 조금 꺾이고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제야 우리는 테니스 경기를 하나쯤은 직접 보고 싶어

그라운드 패스로 입장 가능한 경기장 중 한 곳에 줄을 섰다.

각 경기장 입구에는 직원들이 문을 지키고 있다가

기존 관객이 퇴장하면 줄 서 있던 사람들을 순서대로 입장시켜 주었다.

우리는 간단한 먹거리를 사서 요기를 하며 기다린 끝에 경기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가 간 경기는 미국의 Wolf 선수와 아르헨티나의 Baez 선수의 경기였다.

미국의 Wolf 선수가 득점에 성공할 때마다 미국 관광객들이 늑대 울음소리를 추임새로 넣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덕분에 아이들은 Wolf 선수의 이름을 지금까지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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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직관한 테니스 경기


이렇게 우리 가족의 호주 오픈에서의 첫째 날이 끝났다.
둘째 날에는 큰 아이와 아빠만 아레나 입장권을 끊어서

당시 세계 랭킹 3위였던 메드베네프 선수의 플레이를 직관하고

둘째 아이와 나는 Ball park에서 첫날 해보지 못했던 다른 체험들을 해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은 우리나라 선수가 우리나라에서는 1등이지만 세계에서는 200등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강한 상대를 만났음에도 경기를 잘 리드해 나가다가

다리에 쥐가 나 테니스공을 입에 물고 고통을 참아가며 플레이하다 끝끝내 경기를 포기하는 선수를 보며

선수는 체력관리도 실력, 운도 실력, 불쌍해도 봐줄 수 없는 승부의 세계를 경험했다.

20240114_154739-2.jpg 호주 오픈 포토존에서 남긴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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