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으로 떠나기 직전까지 회사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무언가 준비가 덜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역시나였다.
나는 비행기에서 아이들 키즈메뉴 신청하는 것도 깜빡해서 둘째 아이를 졸지에 쫄쫄 굶게 만들었다.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로 내 옆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둘째의 얼굴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괜히 내 욕심에 아이들을 고난의 길로 내모는 것은 아닐까…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여행에 대한 기대보다는 걱정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여행 중에 아이들이 아프면 어떡하지? 난생처음 해보는 장시간의 밤비행을 소화할 수 있을까?
드디어 호주에 도착했다.
오전 10시나 되어야 이전 사람들이 체크아웃해서 우리 짐을 맡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찌감치 공항을 나섰다.
우버를 타고 오는 내내 창밖에 펼 쳐진 시드니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분명 15년 전 대학생 때 왔었던 시드니 모습과는 사뭇 다른… 지구상의 새로운 도시에 온듯한 낯선 느낌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시드니는 여유롭고 한적하고 평화로웠는데
택시 유리창너머로 보이는 시드니는 복잡하고 바쁘고 여유가 없는 모습이었다.
공항을 지나 지은 지 얼마 안 된 으리으리한 빌딩 숲을 마주하는가 싶더니 곧 우리 숙소에 도착했는데
우리 숙소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낡은 건물이었다.
한국 사람들에게 유명한 시드니 중심부의 4인 숙소는 너무 비싸서 숙소를 조금 외곽에 잡았더랬다.
그래도 내 주머니 사정에 비하면 정말 비쌌던 집인데도
택시가 내려준 우리 숙소는
우리나라로 치면 달동네에 위치할법한 재개발이 되기 직전의 낡은 빌라촌이었다.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생쥐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과연 이런 곳에서 한 달을 살 수 있을까?
게다가 우리 앞에 체크아웃해야 하는 사람들은 10시를 넘겨서도 방을 떠나지 못했다.
30분여의 시간을 덥고 시끄럽게 공사 중인 밖에서 아이들과 길바닥에 쪼그려 앉아 기다리는 시간이 지옥 같았다.
드디어 체크아웃 시간이 되어 우리 짐을 맡길 수 있게 되었을 때 숙소 내부 상태를 보고 내심 깜짝 놀랐다.
남편은 엊그제부터 담이 와서 가방도 못 드는데 2층까지 무거운 캐리어 4개를 옮겨야 했으며
앞서 이 숙소를 쓰고 간 사람들은 숙소 내부에서 신발을 신고 생활했던 것 같았다.
심지어 모기도 엄청나게 많았다.
천장에 붙어있는 수만 세어 봐도 족히 스무 마리는 넘을 것 같았다.
큰 아이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내가 돈이 아주 많은 부모였다면 더 좋은 숙소에서 머물게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몇 푼 아끼자고 아이들을 고생길로 내몬 것 같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이들 앞에서는 애써 의연한척하며
오후 2시 체크인 시간까지
우리가 한 달간 머물 동네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친절한 사장님이 계시던 숙소 근처 카페
얼마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위해 들어갔던 카페.
친절한 카페 사장님은 연거푸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물어가며
아이들이 나중에는 귀찮아할 정도로 계속 말을 걸어주셨다.
영어학원에 다녀본 이력이 있는 큰 아이는 스스로의 영어이름을 Tony라고 정했더랬다.
한국이름과 함께 Tony라고 부르라며 자신 소개하는 오빠와
한국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외국인을 보며
둘째도 자신에게 영어 이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은 이 카페에서 둘째 아이의 영어이름을 Clover로 정했다.
그때는 너무 조급한 선택이지 않았나 싶었는데
둘째는 이때 정한 자신의 영어 이름을 굉장히 잘 쓰고 있고
시간이 지나고 보니
짧은 시간 안에 굉장히 괜찮은 이름을 생각해 낸 것 같았다.
친절한 사장님을 만난 덕에.. 노후된 숙소를 예약해서 아이들에게 미안했던 나에게
그래도 여행 오길 잘했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Barangaroo 산책길
카페에서 바랑가루 쪽으로 내려와 보니
우리가 선택한 숙소는 생각보다 괜찮은 동네였다.
바다 바로 옆에 위치한 동네였는데
크리스마스 시즌이라고 그네 같은 종모양 모형을 타면 예쁜 오르골 소리가 나던 조형물과
달리기 경주 트랙 같은 무지개길은 너무 아름다웠다.
잠깐 마음이 들떴던 것일까?
오늘 막 시드니에 도착한 초보 여행자가
감히 현지 마트에서 장을 봐서 저녁 식사를 주방에서 해 먹겠다는 감히 용감한 생각을 했었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이건 굉장히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우리가 3개월 동안 호주에 있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날들을 꼽으라면
새로운 도시에 도착했던 첫날이었다.
늘 우리 가족의 길잡이 역할을 하던 남편도… 새로운 곳에서의 첫날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분명히 시드니에 오기 전에 구글맵으로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마트를 검색해 놨는데
막상 시드니에 도착하니… 한국에서 보아오던 구글맵과 시드니에서 킨 구글맵은 다른 맵 같았다.
남편은 호기롭게 이곳이 바로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coles라고 주장하며 CBD 한가운데에 위치한 coles로 온 가족을 이끌고 갔다.
곧 있으면 도착하겠지...
에서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지!?
우리 가족은 거의 1시간을 걸은 것 같았다.
초행길은 더 힘든 법.
곳곳에 지나다니는 버스와 트램을 단한정거장이라도 얻어 타고 싶었지만
타는 방법을 몰랐다... 어떻게 결제를 해야 하는지 어디가 정류장인지 어느 방향으로 타야 우리의 목적지에 더 가까워지는 건지도…
결국엔 걷는 수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coles에 도착한 우리
너무 다리가 아픈 아이들은
슈퍼마켓의 재미를 느낄 겨를도 없이 마트 구석 가장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이들이 앉아있는 동안 재빠르게 당장 오늘 먹을 것들만 샀는데
그 사이에 둘째가 잠들어버렸다.
얼마나 고단했을까…
잠든 아이를 깨워보았지만 이런 상태로 다시 숙소로 걸어가는 것은 무리였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줄 모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택시를 부르는 수밖에…
공항에서부터 숙소로 오는 길이 너무나 걱정돼서 호주에서 우버나 디디를 부르는 방법은 열심히 공부했었기에
대중교통 타는 것보다 디디를 부르는 게 더 쉬웠다.
돈을 아끼려고 차를 렌트하지 않았고
돈을 아끼려고 걸어왔던 우리는
엄청난 교통비를 지출해서 택시를 타고 되돌아오는 해프닝을 겪었다.
집에 와서 둘째는 잠들고 남편도 진통이 너무 심해 잠들었다.
큰 아이는 땀에 절은 채 유튜브를 보며 쉬는 동안
나는 온 집안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가 끝난 덕분에 집 상태는 아까보다 많이 괜찮아 보였지만
그래도 찝찝한 거실의 러그를 걷어내 버리니 그 밑에서 엄청난 먼지들이 나왔다.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물티슈로 온 집안의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물티슈에 시커멓게 묻어 나오는 먼지들을 보며… 이 거실에서 신발을 신고 돌아다녔을 전손님 전전손님 전전전손님들을 상상하며
더 닦고 더더 닦고 더더더 닦았다. 한국에서 가져간 물티슈의 절반을 쓴 것 같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돈을 좀 더 들여서라도 CBD에 위치한 레지던스형 호텔을 잡았어야 했나…
이곳에 오기 위해 엄청난 돈을 들여놓고
정작 숙소 같은 곳에서 돈 몇 푼 아끼려다가 여행을 망쳐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책과 후회, 걱정이 나를 힘들게 했다.
시드니에서 한 달간 머물 에어비앤비의 거실
집 자체 아주 많이 지저분한 것은 아닌데… 상당히 낡은 집이었다.
현관문이 바닥에서부터 들떠있어서 그 틈사이로 온갖 벌레가 들어올 것 같아 급한 대로 수건으로 막아두었다.
마찬가지로 발코니와 안방 사이를 오가는 커다란 창문에도 틈이 있어
모기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구조였다.
게다가 화장실에서 바퀴벌레도 발견한 나… 아이들에게는 비밀로 했다.
천장과 벽에 붙어있던 수십 마리의 모기도 다 잡았다.
아이들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강해지고 있었다.
온 집안을 광을 내고 닦으니 제법 괜찮아졌다.
처음 청소를 시작할 때만 해도 시드니에 괜히 온 건가… 하는 불안에 눈물이 날 것만 같더니 나는 역시 강하다. 결국 한 달 살만한 집을 만들어냈다.
시드니에서의 첫 저녁식사
한국에서 가져온 압력밥솥으로 지은 하얀 쌀밥
뜨거운 물만 부으면 완성되는 건식 된장찌개
coles에서 16달러에 산 소고기와 함께
너무 조촐하지만
이 한상을 차리기 위해 어찌나 고생스럽고 힘들고 허기졌던지
아이들은 투정 하나 없이 꿀떡꿀떡 맛있게 잘 먹었다.
내가 대청소를 하는 사이
맥주를 사러 숙소 근처의 주류 판매점을 다녀온 남편 덕분에
시드니 대표 맥주라고 추천받은 pure blonde를 한 병씩 나눠 마시며 행복했다.
다 이렇게 사나 보다.
오늘 하루에 너무 많은 욕심을 낸 것 같다.
살다 보면 힘든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는 건데 도착 첫날부터 지상낙원을 기대했던 걸까.
생각해 보면 오늘 나빴던 순간보다 행복했던 순간이 더 많았다.
아이들과 목이 말라 들렸던 카페의 사장님이 너무나 친절하게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어줘서 행복했고, 점심식사는 맛있었으며, 그곳 바랑가루의 해변 산책길에서 발견한 종모양 그네는 아이들을 행복하게 했고,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도 행복했으며, 무지개 길을 뛰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또 행복했고, 잠깐이지만 시드니 다운타운에서 트램이 지나가는 이국적인 도시 모습을 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