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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타카 Jan 12. 2021

일본 3-1


FAO에서 일을 시작할 당시, 일본 공무원은 그 존재만으로도 나를 긴장시켰다. 축구도 그렇고 야구도 그렇고 배구도 그렇고, 하다못해 애들 달리기에서도 한일전은 온 신경이 집중되는 것이니. 일본 공무원과의 경쟁에 있어서는 무조건 승리의 깃발을 꽂아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약간은 자신이 있었다.


미국에서 유학할 때 알고 지냈던 일본 공무원, 일본 출장 시 만나보았던 일본 공무원의 인상은 ‘단정하다.’와 ‘소심할 것 같다.’였다. 물론 일본인은 본심을 숨긴다고 하니 조심해야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단정하고 소심할 것 같은 일본 공무원이 그 거칠다는 아프리카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동물의 왕국인데.


FAO에 나보다 일 년 정도 먼저와 일을 하고 있던 일본 공무원 M 씨는 내가 알던 일본인 같지 않았다. 집안에서 권위도 있는 것 같고. 하는 행동에서 사무라이의 느낌마저 풍겼다. 당당했고, 날카로웠고, 꼼꼼했고, 거침없었다. 아프리카에 돌아다니며 자신이 할 일을 턱턱 해치웠다. 전문가의 향기가 짙게 풍겼다.


 M 씨는 FAO에 적응하는 데 가장 많은 도움을 준 동료였다. M 씨는 친절하게 아프리카에서 조심해야 될 부분과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알려주었다. 물론 중국 공무원도 친절하게 알려줬지만, M 씨의 조언에 좀 더 공감이 갔다.


일본 공무원 “나이지리아에 가면 조심하세요.”

중국 공무원 “나이지리아는 역동적이고 재미있는 나라지요.”


이런 느낌은 우리나라의 삶의 방식이 중국보단 일본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일본 공무원이 조심하라는 건 꼭꼭 챙겼다. 중국 공무원이나 일본 공무원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건 마음에 새겼다.


M 씨를 만났음에도 나는 일본 남자는 소심할 거라는 편견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M 씨는 특이한 사람이니까.'라며. 이는 과거에 각인 기억에서 기인 거였다. 마치 중국 공무원을 보면서 연변총각을 떠올린 것 같이.  


2008년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일본 남자는 사무라이 같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일본 가정에서의 남자(가장)는 ‘쇼군(일본 막부의 수장)’같은 지위에 있다고도 추측했었다. 이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1997년쯤인가, 학교 후배가 어학연수기간에 알게 된 일본 여성과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인사차 들려서 보여준 사진에는 그의 와이프와 장모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이 들어있었다. 후배는 일본 여자들은 다 이렇게 남자를 받들어 모신다,라고 자랑했다. 그 사진과 후배의 자랑질에 홀딱 빠진 다른 후배도 일본인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들 덕에 주변 총각들은 마시멜로처럼 포근하고 스튜어디스처럼 친절할 듯한 일본 여성에 대한 환상에  빠졌었다.  


미국 유학 시 학교 근처 아파트에 세를 얻어 들어갔을 때,  관리인으로 부터 우리 집 바로 윗집에 일본인 부부가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가웠다.  ‘이 참에 내가 얼마나 자상한지, 잘해주는지 알게 해 줘야지.’ 아내가 그들 부부를 매일매일 목격하길 바랐고, 이를 통해 나에 대해서 좀 더 후한 마음을 써주길 바랐다.  하지만 실상은 이랬다. 일본인 남자는 학교를 다녀와서 빨래와 설거지를 하고, 일찍 일어나 아침운동으로 집안 청소를 하고, 주말에는 장을 봐왔다. 나는 영어로 이어지는 수업을 따라가기도 벅찼는데. 두어 달쯤 되니 아내의 말과 태도가 바뀌었다.  ‘저 일본인 남자 반 만해봐. 맨날 공부가 힘들다며 핑계 대지 말고.’


천만다행이었다. 그 일본인 부부는 다른 집으로 이사했고, 다음으로 또 다른 일본인 부부가 들어왔다. 더하여 남자는 공무원이라는 소식까지 알게 되었다. 이번엔 틀림없이 ‘쇼군’ 같은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나라고 공무원은 보수적이니까. 마침 집사람이 부부끼리 저녁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기쁜 마음으로 그러자고 했다. 나는 거기서 집사람 눈치를 슬슬 보면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일본인 남자를 목격했다. 아내는 동방신기가 나오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대놓고 보며 좋아하는데, 소녀시대를 숨어서 본다는 사내. 후배가 내민 사진 속에서 본 무릎 꿇은 일본 여인은 그저 전통방식에 따랐을 뿐이었다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사진과 후배의 자랑질에 홀딱 넘어가 일본 여인과 결혼한 또 다른 후배가 불현듯 떠올랐다.





M 씨는 내가 아프리카 일에 얼추 익숙해질 무렵 귀국을 하고, 그 자리에는 일본 공무원 S 씨가 왔다. 그는 내가 미국 유학시절에 보았던 그 일본 공무원과 같은 느낌의 사내였다. 부인을 떠 받들고, 집안에 충성하는. ‘이 사람은 소심할 거야.’라고 판단했다. 사람들 앞에서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라는 추측도 있었다. 이렇게 얌전하니 말이지. 하지만 S 씨는 아프리카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현장 일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FAO에 오자마자 일을 척척하고, FAO 자신의 일을 간섭하면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는 이전에 있던 M 씨와 다름이 없었다. 업무능력은 그 어떤 국제기구 직원에도 뒤지지 않았다. 이건 뭐지. 혼란이 왔다. 왜냐면 우리나라 공무원 시스템은 일본에서 들어온 걸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순환보직 시스템이었다. 2년마다 자리를 바꿔야 할 것이며, 처음 일을 맡으면 6개월은 살펴야 하고, 일 년은 지나야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정상인 게 순환보직 시스템이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아니 들어오자 바로 일을 해버리는건. 그렇다면 천재인가.


물어보니 내 추측은 잘못된 거였다. 일본 공무원은 전문성을 무척이나 중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분야에서 대략 20년 가까이 일을 한 사람이었다. S 씨 에겐 두 개의 특기가 있었다. 통계 전문이면서 국제협력 전문이었다. 일본 내에서 통계 업무를 하고 있지만, JICA가 요청할 경우 또는 국제기구와 협력할 필요가 있는 경우 이렇게 외국으로 나와서 일한다고 했다. 그는 태국 정보와 함께 일을 한 적이 있고, 헝가리에서도 일을 했다. 이번 해외업무는 3번째로,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통계지식을 전수하러 온 것이었다. 그는 일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 판은 불공정 경기였다. 한국 선수인 나는 초보, 일본 선수는 프로라니. 그러기에 마음속에 들여놓은 경기장은 접어서 치워버리고 다른 시각으로 일을 하기로 했다. 원조업무에 있어서는 선배니까 배우는 자세로 대하자. 필요할 때는 국적을 떠나 FAO 동료로서 도움을 청하자.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그에게 물어본 것 중 하나가, JICA였다.


KOICA (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한국국제협력단) 하면 떠오르는 조직이  JICA (Japan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일본 국제협력기구) 다. 영어로는 뜻이 비슷한데, 한국은 단으로 끝나고 일본은 기구로 끝난다. 나는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어라, 신기하네.’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KOICA와 JICA가 왜 해석이 다른가에 대해 궁금했다. 해석이 다른 만큼 내용이  틀린가도 알고 싶었다.


S 씨의 말을 듣고 알게 된 바, KOICA와 JICA는 운영이나 권한에 있어서 달과 지구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비록 KOICA가 JICA를 벤치마킹하여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KOICA와 JICA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예산 규모가 틀리고, 권한이 틀리고, 인적자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어느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왜 아프리카에서 KOICA와 JICA의 느낌이 왜 그리 다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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