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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타카 Dec 02. 2020

디테일로 완성하는 똑똑한 정책(발췌)

서양식 군함 프로젝트

중앙부처, 지자체, 정책연구원, 공사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인터뷰 등으로 엮은 책입니다. 지역개발 관련 정책을 중심으로, 어떻게 하면 똑똑한 정책을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담아 보았습니다. 


2015년에 발간된 책이지만, 다시 이와 같은 책을 만들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이 책의 내용 중, 일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조선시대 때, 우리는 디테일한 정책에 대한 고민이 적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즘에도 특정 정책이 혼란스럽게 운영되는 것을 보면, 그 정책에서 디테일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디테일한 정책이 쌓이면 나라가 발전하고, 디테일이 확보되지 않은 정책이 쌓이면 조선처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양식 군함 프로젝트. 


산업혁명이 성공한 서양이 정신문명 추구에 여념이 없던 동양을 향한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던 19세기는 격동의 세기였다. 유럽을 제패했던 나폴레옹마저 ‘잠에서 깨어나면 세상을 요동치게 할 용’이라며 두려워했던 청나라는, 1840년 제1차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해 강제로 문호를 개방했다. 


세계 최강이라 믿었던 청나라가 ‘한줌 밖에 안 되는 병력을 갖춘 서양인들’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은 조선 조정에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그로부터 20년 뒤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킨 서양인들은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마저 점령하고 황제의 대궐을 약탈한 뒤 불을 질러 파괴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조선 조정에서는 이러다가 청나라가 숫제 망하여 조선마저 침략을 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긴장감마저 팽배했다.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조선 조정에 무역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던 1866년 8월은 바야흐로 이런 시절이었다. 


제너럴셔먼호의 선원들은 교섭을 거부하는 관료 이현익을 붙잡아 감금했다. 이에 격분한 평양 군민들은 강변으로 몰려들었고, 위기감을 느낀 제너럴셔먼호의 승무원들은 대포와 총을 마구 쏘아대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마침 조수 간만의 차로 모래톱에 걸린 제너럴셔먼호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고, 평양감사 박규수는 기름을 뿌린 목선들에 불을 붙여 공격함으로써 제너럴셔먼호를 격침시켰다. 


그로부터 한 달 뒤에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했다. 바로 병인양요였다. 조선 조정은 이번에도 심각한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을 감수한 끝에 프랑스군을 물리쳤으나, 여론은 잇따른 서양 오랑캐들의 침공으로 인해 들끓었다. 흥성대원군을 비롯한 조선 조정의 관료들은 서양식 군함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며 이구동성으로 주장했다. 


엄청난 화력을 갖추고 조선의 군함들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는 거대한 서양식 군함을 물리칠 수 있는 효과적인 정책을 무엇일까?


서양식 군함에 맞설 수 있는 신형 군함을 건조하자는 아이디어가 제시되었다. 거북선으로 일본 함대를 박살냈듯이 말이다. 


그러나 증기로 움직이는 서양식 군함을 만들어본 적이 없는 조선이었다. 당장 대동강에 가라앉아 있던 제너럴셔먼호를 인양하여 복구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아이디어가 확정되니, 본격적인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조선 최고의 장인 김기두를 비롯한 선박 건조전문가들을 모으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엄청난 규모의 재정지원 계획도 마련되었다. 


한시라도 빨리 서양식 군함을 갖추려는 조정의 뜻에 따라 김기두 팀은 청나라를 통해 입수한 증기기관 및 서양식 선박 관련 도서들이라든가, 제너럴셔먼호의 잔해에서 입수한 증기기관 등을 연구하며 서양식 군함 프로젝트에 박차를 가했다. 


흥선대원군은 김기두를 만나 10개월 안에 서양식 군함을 완성시켜달라고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후 조정에서 서양식 군함 건조 과정에 대한 점검이 나올 때마다 김기두 팀은 기술적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조정의 지시는 변경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조선의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상명하달식 조직 문화 탓에 현장책임자의 말이 조정에까지 전달되기 어려웠으리라 짐작된다. 


어찌어찌 배의 모든 뼈대가 완성되었고, 그 뼈대에 판자를 입히는 작업까지 진행되었다. 그러나 증기기관 제작은 여전히 문제였다. 


제너럴셔먼호의 것을 수리한 뒤 가동시켜봤으나 소용없었다. 애당초 그 당시 조선의 기술력으로 증기기관을 마련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무모했다. 쇠를 다루는 기술력은 낮았고, 증기기관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 조선의 광업 능력으로는 증기기관에 사용되는 화력 좋은 연료인 석탄을 쉬이 확보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화력이 낮은 장작을 쓰기로 했다. 


이리하여 조선 최초의 서양식 군함이 만들어지자, 조정은 진수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서양의 크고 빠른 전함들이 또 언제 침공해올지 모른다며 두려워하던 백성들이 진수식 소식을 듣고 한강변에 모여들었다. 


백성들은 위풍당당하게 떠있는 신식 군함을 보고 앞 다퉈 “주상 전하 천세!” 외쳤다. 이제 서양 오랑캐들이 쳐들어와도 저 신식 군함이 무찔러 주리라는 기대감이 팽배했다. 신식 군함 위로 툭 튀어나온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자 백성들의 함성은 더 높아졌다. 


신식 군함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제작을 기획했던 조정 관리들과 김기두의 팀원들 등 참여했던 자들 모두 그 많은 시간 동안 흘려댄 피와 땀과 눈물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허나 한참 동안 지켜봐도 신식 군함은 고깃배보다도 못한 속도로 느릿느릿 전진할 따름이었다. 기민하게 움직이며 서양의 군함들을 박살내야 할 조선의 신식 군함은 결국 그 주변에서 함께하던 고깃배들에게 추월을 당할 지경이었다. 


김기두는 그 원인을 알고 있었다. 증기기관 안에 증기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실린더 내부와 피스톤 사이에 빈틈이 많아 그 미약한 증기마저 술술 센다는 사실을 말이다. 실망한 백성들이 막걸리나 먹으러 가자며 흩어지자 서양식 군함 프로젝트는 막을 내렸다. 


서양식 군함을 확보하겠다는 조선 조정의 정책이 완전히 무산된 것은 아니었다. 이로부터 30여 년 뒤인 1903년, 고종 황제는 일본의 민간 회사로부터 군함을 사들였다. 그러나 그 실체는 영국제 구형 석탄운반선에 소구경 함포 네 문을 달았을 뿐이었다. 무려 40년쯤 전의 제너럴셔먼호와 별로 다를 게 없던 바로 이 ‘최초의 서양식 군함’에는 양무라는 이름까지 붙여졌다.


이마저 신식 군함 운용 훈련을 받은 승무원도 연료로 쓸 석탄도 구하기 어려워 항구에서 놀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1년 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함포 한번 못 쏴보고 일본 해군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 1907년에는 군대 해산이 이어지더니,  1910년에는 숫제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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