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창인 양 찌르는 비판은 사양

by 이타카

마마보이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 앞으로 목격할 가능성이 있은, 고통을 당할 수 있는, 진실의 창인 양 찔러댈 비판에 대한 사양의 글을 적는다. 스스로에 대한 방어보단, 진실이 무엇인지 판별이 어렵기에 그렇다.


이런 사양의 글은 코넬 대학교에서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저명한 학자로 알려진 C교수의 강의를 듣다 보니, C교수가 미국 교육정책에 대한 불만이 매우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버드 대학교의 연구자들이 미국 교육을 다 망쳤다는 게 요지였다. 그에 반해 한국의 교육은 정말 대단하다 추켜세웠다.


C교수에게 세뇌당했는지, 미국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었다. 미국을 지탱하는 건, 군대식으로 훈련받은 소수의 엘리트 층과 해외에서 유입된 인적자원인 듯 보였다. 소위 하버드 대학 학자들이 발전시킨 미국식 교육의 혜택을 받은 아이들은 그들 부모 세대와는 다르게 보였다. 카우보이로 대변되었던 독립심이 강한 부모세대와는 달리, 캥거루가 되길 바라는 젊은이가 늘어나는 게 보였다. 가능한 편하게 살려고 버둥거리는 이들이 늘어나는 게 보였다.


우리나라 공교육이 망하기 전 경험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들어오고 몇 년 있다가, 미국식이니 유럽식이니 하는 교육을 따라가야 한다는 열풍이 불었고, 그게 정답인고 진실인양 온 국토로 퍼져나갔다. 필자는 이를 비판할 주제가 안된다. 다만 그 결과를 볼 수 있는, 들을 수 있는 눈과 귀가 있다. 2025년 공교육의 현실에 대해 독자분들이 보고 듣는 바와 다르지 않다. C교수가 이렇게 변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고 무슨 말을 할까.


유학 당시, 영어가 부담스러워 통계학이란 통계학은 최대한 들었다. 그러다 보니 경제 통계, 정책 통계를 망라했다. 통계학은 all A를 받았다. 이 학교가 얼마나 점수가 짠지, 그 짠 점수 때문에 자살하는 학생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는 분은 all A의 의미를 짐작하실 것이다.


이때 사회학, 혹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이론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제한된 그룹을 대상으로 연구하고 이를 통계화하여 만든 이론은 시작부터 오류를 품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후 몇 천만 명도 아니고, 몇 만 명 혹은 몇 천명의 사람을 대상으로, 그것도 일부 국가를 대상으로 연구한 후 만든 이론을 바라볼 땐, 색안경을 쓰게 되었다.


가난한 나라를 위해 일할 기회가 몇 년간 있었고, 지금도 일하고 있다. `인지심리학`이랄까, 이를 기반으로 한 `행동경제학`이 현실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일한다. 선진국에서 떠드는 이론은 가난한 나라에선 통용되지 않는다. 거기도 인간 세상인데 말이다.


필자는 어쩌다 보니 이탈리아에서도 몇 년간 생활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나라와 유사한 면이 많은 나라다. 이상과 정의에 대한 열망이 가득하다. 가톨릭국가라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장년이 되어도 부모품을 못 벗어나는 캥거루족의 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탈리아 엄마의 아이에 대한 집착이랄까, 사랑은 유럽 내에서 유명하다. 우리나라 마마보이와는 다소 결이 다른 듯 보이지만, 수많은 마마보이들이 엄마에게 달라붙어, 엄마 아빠의 연금을 쪼개 먹고산다.


일자리가 없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힘든 일은 외국인 노동자의 몫이다.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힘든 일보다는 부모를 뜯어먹고사는 걸 택하였다. 이탈리아 공무원 출신과 대화를 하다 보니, 정책이나 사회 분위기가 이런 상황을 오래전부터 조장해 온 면도 있는 듯 보인다.


여기서 필자는 혼란이 온다. 가난한 나라에선 통용되지 않는 이론, 미국과 이탈리아에 한정되긴 했지만 이런 선진국에선 캥거루를 늘리는 이론처럼 보이는 주류의 논리나 이상. 이런 게 진실일까? 아이들을 행복하게 키우는 답일까? 우리 가족이 잘 되게 하는 길일까? 그렇기에 이런 이론이나 주장을 진실의 창인 양 들이대면 납득할 수 없다.


앞으로 이 글을 보시는 독자분은 이곳저곳에 진실인 양 떠도는 이론이나 주장으로, 필자의 글에 잣대를 세우기 전에, 객관적인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셨으면 좋겠다. 물론 필자의 글에는 오류도 있을 수 있고, 편협된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아니 있을 것이다. 필자가 경험하고 목격한 마마보이는 일부다. 우리나라 마마보이 전부를 들여다보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사람으로의 한계도 분명하다.


필자의 글 중 마뜩지 않은 부분이 보이시면 주변에서 눈에 들어오는, 귀에 들어오는 청년으로 성장한 마마보이, 장년이 되어 아이를 가진 마마보이, 아니면 내 자식 또래의 마마보이. 캥거루처럼 부모 곁에서 떠나지 않는 이들를 살펴봐주시길 부탁드린다.


우리나라 마마보이나 이탈리아 마마보이에게 공통된 점이 크게 두 가지 있는 듯 보인다. 굳이 마마보이만 가진 특징이라 하긴 그렇지만, 두드러져 보인다.


첫 번째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결해 나가는 힘이 약해 보인다. 자존심이란 말로 포장해서, 인간의 권리란 말로 치장하면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피하고, 이를 정당화한다. 아무리 좋은 대학교를 나오고, 아무리 좋은 직장에 들어갔어도 적응이 어렵다. 부모에게 기대고, 더 하면 아이들에게까지 기댄다.


두 번째는 부부로써의 책임, 부모로서의 책임을 힘들어한다. 그러니 혼자 사는 게 속 편하고 즐겁다. 아이들이 없는 게 아이들에게 좋다고 믿기도 한다. 이 힘든 삶을 아이에게까지 물림 하기 싫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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