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사한 이론, 귀에 쏙쏙 들어오는 주장을 걷어내고, 삶의 경험으로 쌓은 안목으로 판단해 보자. 사회 적응이 어려운 사람이 매사에 `비교`에 능하면 어떨까? 느낌적으로만 볼 때도, 암울한 삶이 될 것 같지 않은가? 행복한 삶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시야를 넓혀 보면, 그런 사람을 주변서 발견할 수 있음에 놀란다. 남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소스라친다.
이탈리아는 마마보이라 간주할 수 있는 성인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마마품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벗어나고 싶어 하지도 않는 이들이다. 그들 중 나와는 다르게, 행복해 보이는 보이들이 있었다.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 마마와 같이 웃고 떠들고 화목할까?라는 궁금증이 컸다. 지속적으로 관찰한 바, 그들은 `비교`에 관심 없어 보였다. 비교보단 `하느님의 사랑`이 더 중요한 듯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나라는 `비교`가 문화이기에 대부분 아이들이 `비교`가 능숙해질 가능성이 높다. 비교가 나쁜 점만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스스로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아이는 `비교`를 발전의 동력으로 삼을 수도 있다. `비교`가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되면 현실에 집중하는 융통성도 부릴 수도 있다. `비교`의 덫을 회피하는 요령도 생길 수 있다.
문제는 마마보이다. 스스로의 삶을 책임질 힘을 기르지 못한 보이에게 비교는, 벗어날 수 없는 지독한 올가미가 된다. 이 올가미는 현세의 지옥으로 끌어당기는 악의로 진화한다.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는 삶에 대한 분노, 그렇게 만든 마마에 대한 저주, 그런 와중에 끊임없이 주변과 비교해 가며 자신에게 손가락질해 대는 자괴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부족함이 없는 듯한 보이도 괴로움에 몸부림칠 수 있다. 60을 바라보는 필자도 간혹 그런다. 스스로의 삶을 책임질 힘을 기르기 위해 발버둥 쳤고, 버틸 만큼의 힘도 길렀지만, 마마보이로 양육된 근원적인 한계는 들러붙어 있다.
사물에 대한 판단이 어렴풋하게 형성될 무렵, 케네디 가문의 이야기를 들었다. `태어났으면, 케네디 가문 같이 살아야지.` 하는 게 마마의 속삭임이었다. 자라면서 케네디 가문이야기는 그물 펼쳐지듯 주변으로 확산되며 다양한 속삭임으로 세분되었다. 실체가 분명한 그런 속삭임이었다. 얼굴을 마주할 지근거리에선 사촌이 전교에서 1,2등을 한다. 조금 멀게는 무능력한 파파와 비교할 수 없는 정치인과 갑부들이 저런 차를 타고 다닌다. 백화점에서만 물건을 사는 이들이 조명된다.
더하여 마마는 보이가 최상의 결과만 바라보길 원했다. 저런 결과를 우리 보이가 반드시 쟁취할 거야란 믿음도 있어 보였다. 벗어나기 어려운 평생의 족쇄가 채워지는 과정이다. 악의의 올가미가 점점 형체를 드러낸다. 결과를 향해가는 과정이 희미해지는 만큼 올가미는 뚜렸해졌다.
결과는 너무 우뚝 솟아 있었다. 어렴풋 보이는 결과를 향해 나아 가는 길은, 결과라는 큰 기둥의 그늘에 가려졌다. 맨날 티브이에서 만화만 보다가 성적이 떨어져도, 공부 잘하는 친구는 머리가 좋아서, 돈 쳐들여 좋은 과외를 해서, 아니면 타고날 때부터 운이 따라서. 정리하자면 공부 잘하는 애들은 죄다 로또에 당첨될 행운아처럼 보였다. 결과만 눈에 들어오는 비교는, 운빨과 남 탓에 기대는 인물로 성장하는 양분이 되었다. 위만 보려 하는 눈을 형성헸다.
보이의 눈이 위로만 가있음에, 집사람은 안타까워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살라는 게 집사람의 끊임없는 요구였다. 지독한 암에서 벗어난 것만 해도 천운이었다. 학습이란 면에 치우치긴 했지만, 노력하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온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삶의 경험에 따르면, 노력하고도 제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기에, 무어라도 결과가 좋으면 만족해야 한다.
전세계 120개가 넘는 굶주리고 가난한 나라를 위해 일하다 보니, 대한민국에 태어난 자체만 해도 커다란 행운이란걸 알았다. 그 대한민국에서도 중산층 가정에 태어난 건 축복이었다. 어릴 적부터 세뇌당한 `비교`의 안대가 눈을 가려 보지 못한 것 뿐이었다.
마마보이가 끊이지 않고 탄생하는 걸 지켜보는 요즘. 가장 안타까운 건, 끊임 없이 잣대를 대는 삶을 보이에게 주입하는 마마를 볼 때다. 사회생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보이가 비교에 능한 자로 커나가면, 마마를 끊임없이 저주하는 인물로 완성된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나는 저 사람처럼 못 큰 건, 저 사람 마마보다 덜 떨어진 내 마마 때문이다.`란 생각이 마마를 끊임없이 저주하게 만드는 발전기가 될 거란 걸 모르는 모양이다. 보이가 가장 강력하고 잔인하게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마마라는 걸, 마마는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정도로, 보이가 해달라는 건 다해주는 마마라면. 비교를 꺼내 들어서는 안된다. 비교를 해가면서 보이를 이끌어서도 안된다. 가야 할 방향까지 제시하는 건 최악이다. 공부를 잘한다고 마마보이로 키운 애가 마마보이가 안될거란 생각은, 스스로 잘났다고 착각하는 마마가 저지르는 흔한 실수다. 그러니 비교는 최대한 숨겨야 한다. 성인의 된 후에도 캥거루처럼 달라붙게 될지 모를, 미래의 보이의 입에서 저주를 듣고 싶지 않다면. 보이와 손잡고 죽을 때까지, 현세의 지옥에서 바둥거리고 싶지 않다면.
캥거루가 도처에 있는 이탈리아에 처음 도착했을 땐 잘 몰랐다. 저 캥거루가 마마보이라는 걸. 행복해 보였고, 스트레스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로 판단하건데 하느님의 사랑만으로, 부처님의 자비만으로 사는 마마와 보이는 그나마 행복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