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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타카 Feb 10. 2021

현장에서 잘 하기



첫 번째, 전문성.


내가 일했던 오피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해외원조 분야에서 10년 이상 일한 전문가들이 주를 이루었다. 다른 나라 공무원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중국 공무원은 대략 25년, 일본 공무원은 대략 15년. 반면에 나는 국제기구에 발을 내딛는 그 순간에 첫 1초가 시작된 그야말로 초보 중에 초보였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표선수 같은 처지에 놓인지라, 끝도 보이지 않게 앞서간 사람들을 쫓아가기 위한 뜀박질을 해야 했다.


우리나라 공무원 조직은 집단지성을 존중하며, 부정부패를 최소화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빠르면 1년, 늦어도 3년 이내에 자리를 바꾸면서 새롭게 일을 하는 순환보직 시스템이다. 순환보직 시스템에서, 엄밀한 의미의 전문성을 키우기는 어렵다. ‘돌고 돌다 보니 같은 일을 10년 이상 하게 되었다.’라면 모를까. 우리나라에서 일을 할 때엔 깊이 있는 전문성을 아쉬워하며 일했다. 국제기구에서는 아쉬워할 여유조차 없었다. 발등에 용암불이 떨어졌으니.


중국 공무원과 일본 공무원과  은연중 비교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심리적인 위축을 불러왔다. ‘일등은 못해도 중간은 가야 될 터인데.’라는 강박관념이 뿌리 깊게 박혀있던 탓이었다. 허풍을 칠 것 같던 중국 공무원이 디테일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의견을 주장하는 모습. 소심하게 보였던 일본 공무원이 아프리카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할 일을 턱턱 해치우는 광경. 대단했다. 언제쯤 내가 저리 할 수 있을까.


순환보직 시스템의 장점인 집단지성에 의지해 보자 싶었다. 현실은 순환보직에 휩쓸려 빙빙 돌았다. 우리나라 담당자와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아이디어를 짜내어 대응을 하려 해도, 담당자는 1년에 한 번씩 바뀌었다. 1년에 한 번씩 리셋되는 광경을 지켜보는 기분. 사정을 빤히 아는데 담당자를 비난할 수도 없고.


게임이 돼야 경쟁을 하는 것이다. 슈퍼 헤비급과 슈퍼 라이트급이 붙이면 슈퍼 라이트급이 싸울 맘이나 나겠는가.  자신보다 두배도 더 커 보이는 덩치를 바라보는 슈퍼 라이트급은 다리가 풀릴 것이고, 살고 싶다는 본능이 이성을 마비시킬 것이다.


‘어차피 내가 무엇을 했는지 우리나라에서는 모를 테니. 대충 할까.’ 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냥 대충 남들이 쓴 보고서를 베껴대면서 시간을 때우고 돌아가자는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이 그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귓가를 가로질러대는 풍문들은  마음을 바짝 당기게 했다.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이나 날아가야 도착하는 어디 어디 나라의 ***담당자의 소식이 툭툭 들려왔다.  나도 잘 모르는 옆 사무실 동료의 행태를 아프리카 오지에서 들을 수 있었다. 뒷담화는 무섭게도 빠르고, 공포스럽게도 은밀하고, 끈질기게도 강한 생존력이 있었다.


‘외국 나와서 국제적으로 욕먹을 일이 있나. 하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고민을 정지시키고 앞만 보고 내달리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뒤꽁무니라도 잡겠지.  


3년 동안 다른 동료들의 전문성에 굴복하지 않고 버틴 주요 동력은 아이러니했다. 전문성을 가로막았던 ‘순환보직’의 경험과 지식이 힘차게 등을 떠밀었던 것이다. 성과관리, 지역개발, 식품 안전성부터 대학원 때 배웠던 모든 것들이 몽땅 끌려 나왔다. 동시에 얼굴에 철판을 때려 붙인 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궁금하면 물어보고, 배웠다.


그 결과 마지막 3년 차에는 '참 잘했어요'라는 말을 들었다. 그에 대한 내용은 인터뷰로 정리되어 인트라넷에 실렸다. 전 세계에서 근무하는 FAO 직원들이 다 볼 수 있도록. 이쯤이면 된 것이었다. 내 능력으로, 남은 시간으로 더 이상은 할 수 없는 것이니.


전문성에 대한 아쉬움은 무의미하다. 이미 일어난 상황. 내가 바꿀 수 없는 현실이기에. 그러니 있는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상황에 대처하자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내 선배들도, 내 아버지 세대도 그리했다. 그런 대처들이 모여 우리나라를 선진국 대열에 합류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밤낮없이 일하고, 휴일도 반납하고 하여 짜낸 대처들이다.  


하지만 후배에게는, 아이들 세대에는 조금은 수월한 대처법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그러니 국가차원에서 전문성에 대해 고민을 했으면 좋겠다. 밤낮없이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면서 일해야 하는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두 번째, 정보.


현장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다. 아쉬운 마음에 현장에 대한 정보가 ‘한글’로 친절하게 정리된 사이트가 있을 거라는 기대는 바로 실망으로 치환된다.  우리나라 외교부에서 제공하는 정보도 세밀하다. 하지만 현장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국제기구, 유럽, 미국 같은 나라들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다 뒤적여야 했다.


내가 현장에 나가서 일을 할 때 필요했던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어디서 유심칩을 바꾸고 어디서 환전을 해야 하는지가 시작이다. 공항에서부터의 이동, 호텔의 식수 상태, 질병, 테러나 범죄 같은 것에 대한 안전성 확보가 그다음을 잇는다. 프로젝트 대상지역으로 좁혀 들어가서 그 지역에 특화된 병이 있는지, 그 밖에 다른 문제는 없는지를 알면 좋다. 음식 맛도 중요하다. 입에 맞지 않은 음식을 몇 주씩 먹으면서 돌아다니는 건 곤욕이니. 그들이 쓰는 언어에 대한 정보도 필요하다. 공용어(영어, 프랑스어 같은 언어)를 할 수 있는지 아니면 부족어만 가능한지 미리 알아야 계획을 짜는데 도움이 된다. 날씨도 체크사항이다. 우기 때는 야외에서의 활동이 제한되고, 폭우라도 내리면 꼼짝 못 하고 실내에 있어야 한다. 같은 나라라도 사막지역에 갈 경우는 가을 점퍼 한 개는 따로 준비해야 한다. 정치적인 영향력이 큰 부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악연을 쌓게 되면 현장일이 어려워진다. 종교는 어떤지. 테러가 발생하고 있는 나라라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사람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케냐를 간다면 북부와 남부 사람이 다르다. 더하여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도 알아 두면 좋고.


이런 정보들을 몇 개의 사이트에서 모두 찾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손품을 팔 수밖에. 인터넷을 뒤지고, 뒤지고. 유용한 사이트는 링크를 걸어 놓고. 여행수기, 업무 수기 등도 열심히 모으고. 그러다 보면 디테일하게 도움되는 무엇을 건져낼 수 있다.


아프리카 3년 간의 일을 마치고, 생긴 습관이 있다. 어디에 여행을 가게 되면 그 지역에 대한 정보를 탈탈 턴다. 집사람이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면서 '여행사 차릴 생각야?'


세 번째, 원조를 권리처럼 생각하는 사람 이해하기.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나랑 상관없는 투명한 사람’이라고 취급하는 것도 방편이다. 일을 하다 보면 고마움보다는 ‘당연히 잘 사는 너희가 우리를 도와지’라는 투의 말을 흘리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좋은 감정이 일어나긴 어렵다. ‘도와주면 고마움을 느껴야지, 당연한 거로 봐? 이놈 나를 호구로 아나?’ 하지만 이런 감정은 도움되지 않는다.


상대방이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 상황을 접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떠올려 보자.


'나는 지구란 행성에 있는 기득권 국가 중 하나인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단지 그 이유로 굶주리지 않았고, 교육을 받았고, 비교적 수월하게 기회를 잡았다. 더하여 대한민국이 돈이 많은 나라이기에, 가난한 나라 사람들 앞에서 부러움의 눈총을 받으며 서 있을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나와 현장에서 부딪히며 일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났다. 그 이유로 굶주려야 하고 교육을 제대로 받기도 어려웠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에 돈 많은 나라에서 온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도록 노력도 해야 하고. 더하여 이들은 독립 후 대략 70년 간 원조에 의존한 나라에서 살고 있다. 어릴 적부터 보아온 게 원조다. 그러니 그들이 나쁜 마음이 있어서 ‘도움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닐 터다. 처지를 비관하는 마음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에 나온 한탄이다.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굳이 잘해주라는 것은 아니다. 좀 더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일을 하자는 것이다. 나는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대하면, 그들을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사용하는 돈은 세금에서 나온 것.  마냥 착하게만 보일 수는 없었다. 지원을 줄이고, 기회도 줄였다.


네 번째, 원조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인정하는 마음 자세.


 원조의 원칙이 이러저러 하니. 당연히 이러저러해야 되지.라고 생각하면서 일을 하면 힘들어질 수 있다. 일이 꼬일 수도 있고.


현장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기웃거리다 보니 원조 이론이 현장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 때문에 그리 된 것인지에 대해 고민도 하게 되었다. 그런 고민이 하나둘 쌓이다 보니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논리도 생겼다.


우리나라에서 접할 수 있는 원조 관련 책은 제한적이다. 발행해 보았자, 이익이 남기는 어려운 분야이기 때문이다. 출판사에서 해외원조에 대한 책을 출판하기를 저어하니,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출간되었던 원조 이론이 아직까지 이빨을 성성이 드러내며 이어져 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정작 호랑이는 죽어 가죽만 남아 있어도.  


나는 2008-2009년도에 미국에서 원조와 관련된 수업을 들었다. 당시 내 머릿속에 그려진 원조의 개념은 ‘땅따먹기’였다. 교수님들이 고상한 이론을 소개하고는 ‘땅따먹기’ 같은 느낌의 사례를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토론도 유럽과 미국의 대결에서 어떻게 하면 미국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가에 대한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고상한 이론과 말을 앞세워서. 명분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니, 원조에 대한 이론과 고상한 가치는 마음에 담아 두고, 현장에서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대응하는 게 마음을 편하게 한다. ‘저런 나쁜 놈이.’ ‘이건 반칙이야’ ‘도대체 이곳에 희망이 있을까’라는 고뇌와 고민을 시작하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답 없는 질문에 마음이 지치고 몸이 지친다.


해외 원조 일을 하면서 잘했다고 스스로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도움을 주는 나라가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나도 내가 한 일이 수혜국의 변화에 도움이 되길 바랐다. 그러나 3년 동안 그들에게서 변화의 조짐을 보기보다는 그들 사회에 가려져 있던 부정과 부패, 불합리, 전근대적인 관행을 좀 더 명확히 보게 되었다. 그때 든 생각은 '이런 상태로는 어렵다.'였다.  귀국할 때까지,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실마리가 무엇 일지를 생각해 보았다. 깜깜했다.


귀국 후 어느 날 공원을 거닐다가 공원 중간쯤에 서 있는 커다란 비석을 바라보았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글이었다. 한순간 시선이 글에 들러붙었다. 나는 글귀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진즉 이 공원에 왔었다면. 그리고 이 글귀를 마음에 담고 아프리카 일을 했었더라면.’


같이 일했던 그 많은 아프리카의 지성인들에게 이 글을 소개하고 싶다. 대한민국은 안창호 선생님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발전한 거라고도 말하고도 싶고.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이 될

공부를 아니하는가.‘




지금까지의 글은 김진국 교수님과의 공저인  '가난과 배고픔의 길 위에서 _ 해외원조'의 내용 중 저자의 집필 부분 중에서 발췌하여 재 구성한 것이다. 김진국 교수님편은 보다 이론적이고 전력적인 부분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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