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쉽게 목격할 수 있는 광경이 있다. 지지율이 고공행진 하던 정치인이 곤두박질하는 모습. 기대했던 정책이 그 기대를 무너뜨리는 모습. 바꾸면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이 나중에는 그 나물에 그 밥이 돼버리는 것 같이 되는 모습.
왜 그럴까?라는 의문은 있었지만, 정치엔 가능한 관심을 두지 않고 맡겨진 일에 충실하려 노력했다. 2015년 출간한 ‘디테일로 완성하는 똑똑한 정책’은 정책 실무자 20여 명을 인터뷰해서 마련한, 맡겨진 일에 어떻게 하면 충실하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책이다.
그런 와중, 국제기구에서 근무 하게 되었다. 3년 간 10년 이상 한 분야에서만 일하는 전문가 집단의 일원으로 일했다. 통상 2년이면 자리를 바꾸는 우리나라 공무원 조직과는 딴판인 세계. 한자리에서 3년쯤 일해야 초보티를 벗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집단. 더하여 아프리카 현장에서, 우리나라의 미래가 결코 보장된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된 일이 있었다. 그 이후 무언가를 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2015년 하반기. 나이지리아, 코트디부아르, 부르키나파소라고 하는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심 당황했다. 그때 나는 이들 세 나라가 서아프리카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코트디부아르와 부르키나파소는 이름조차 생경했고. 이처럼 아프리카를 모르는 사람이 아프리카에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에 한동안 잠을 설쳤다. 아프리카에 대한 지식은 ‘동물의 왕국’과 ‘헐벗고 순진한 원주민’에 대한 이미지가 전부였던 때였으니.
그나마 다행인 점은 사무실이 로마에 있다는 거였다. 내가 일하게 될 UN 산하 조직인 국제식량농업기구(FAO) 본부가 로마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사무실에서 만반의 준비를 한 후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방문해, 그들 나라의 식량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게 나의 임무다. 우리 정부에서 지원하는 프로젝트의 담당자로서.
2016년, 부르키나파소를 방문해야 했다. 처음 가는 나라. 사전에 최대한의 정보를 학습하는 게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예의이자 일을 매끄럽게 하는 방편이다. 이런 경우 나는 CIA FACTBOOK을 자주 이용한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로 그 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미국 중앙정보국)에서 제공하는 자료다.
CIA FACTBOOK에 따르면 부르키나파소는 북한을 떠올리게 하는 나라였다. 일단 일인당 소득 수준이 비슷하다는 점에 눈길이 갔다. 인구수는 2,100만 명. 면적은 북한보다 크지만 천연자원은 그리 풍부하지 않은 나라. 사하라 사막에 인접해 농사를 지을 땅이 적었고 바다가 없는 나라이기도했다. 종합해 보니 북한보다 오히려 자연여건이 열악했다.
기아 해결을 위한 미션은, 도시보단 시골에서 일하는 경우가 잦다. 부르키나파소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골은 잠자리와 음식, 안전 문제로 숙식이 곤란했다. 기대했던 동물의 왕국은 없었다. 목격한 동물이라곤 집안에서 기르는 닭, 동네 어귀에 어슬렁거리는 얼굴이 길쭉한 아프리카산 개. 당나귀... 나중에 알게 된바, 이렇게 가난하고 배고픈 나라 사람들은 식량이 될만한 건 잡아먹던지, 잡아서 팔아 돈의 버는 게 생존의 한 방식이란 것이었다. 우리나라도 굶주릴 때, 산에서 멧돼지를 보기 어려웠던 것처럼.
그들의 삶에서 어릴 때의 광경을 엿볼 수 있었다. 비가 올 때 슬라브지붕에서 졸졸거리며 떨어지는 물줄기를 보며 즐거워했던 때의 미소. 부르키나파소 아이들 얼굴엔 그런 미소가 있었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게 고단해 보이는 얼굴들이 웃음을 지으며 서로를 토닥이는 모습은 정겨웠다. 그 와중에 배가 불룩 나와 뒤뚱이는 사람들. 이따금 볼 수 있는 배고픈 나라의 잘 사는 사람들이었다. 어릴 적 ‘배 사장’을 떠올리게 하는.
예전 추억에 휩싸인 나를 보면서, 누군가 ‘이런 나라에서 살 수 있겠냐’고 물어본다면 답이 ‘아니오’다. 내가 만약 부르키나파소에서 살게 되면, 열악한 물과 음식 그리고 의료서비스로 암이 재발할 가능성이 높을 듯한 게 첫째 이유다. 더하여 부르키나파소가 떠올린 어릴 적 기억은 유쾌한 것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쌀이 떨어졌다고 걱정하는 시절이었다. 변소 벽에 기어 다니는 허연 구더기가 장난감이었던 시절이기도 하고.
아프리카를 떠난 비행기가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 착륙할 때, 묘한 감흥이 일었다. 왠지 북한 시골에서 일하다가 남한으로 넘어온 기분이랄까.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나라와 엇비슷한 이탈리아이기에 그랬다. 부르키나파소의 1인당 국민소득이 북한과 엇비슷한 것처럼. 무사히 선진세계로 돌아왔음을 안도했다.
다음 출장지는 코트디부아르였다. 출장 중 코트디부아르 출신 경제학자이자 유엔 직원인 G 씨를 만났다. 그는 우리나라 발전에 대해 관심이 지대했고, 자신이 정립한 이론도 있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대한민국이 발전한 것은 착한 독재자가 있어서란 거였다. 코트디부아르에는 그런 독재자가 없어 오랜 내전을 겪었고, 이로 인해 서아프리카의 종주국 자리에서 내려앉았다는 해석이다.
아프리카에서 우리나라 발전에 대한 찬사를 듣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나, G 씨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대한민국은 열심히 일한 국민들이 발전시킨 것이다.’ ‘대한민국의 교육열은 대단하다. 이런 교육의 힘이 국가 발전에 도움된 것이다.’란 요지로 G 씨의 말에 대꾸했다. G 씨는 미소를 지으며 질문했다. ‘북한과 남한은 다른 민족이냐.’는 거였다. 같은 민족이라면 열심히 일하는 것도 비슷할 것이고, 교육열도 그리 차이 나지 않을 텐데. 이것만으로 대한민국이 발전했겠느냐는 의미다. 지금 북한은 코트디부아르보다 못 사는 부르키나파소와 비슷한 처지인데.
나는 이 말을 제대로 반박할 논리를 떠올릴 수 없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차이 때문일 거라는 두리뭉실한 답으로 마무리했다. 사회과학 지식과 논리 전개에 약한 이공계 태생의 한계였다. 코트디부아르에서는 사지가 절단된 사람들을 곳곳에서 보았다. 오랜 내전의 상처였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6.25 때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1970년을 기준으로 볼 때 우리나라와 북한, 부르키나파소,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력은 도토리 키재기 수준이었다. 그런데 50년이 지나는 동안 도토리에서 에베레스트산 높이만큼 차이가 벌어졌다. 앞으로 50년 동안 이 차이가 변화하지 않고 계속될까. 아니면 크게 달라질까. 심란한 고민에 빠지다 보니, 미래에 대한 상상이 이리저리 확장되었다. 예를 들어 미래 어느 시점에 부르키나파소 사람이 우리나라를 도와주러 방문하는 일 같은.
아프리카 일을 마무리하며 이 심란함을 마음 깊이 묻고,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자 생각했었다. 내가 어찌해 볼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삶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암에 걸리고, 암을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갈 때, 오랜 암투병을 하시던 외숙부님이 곁에서 지켜 주셨다. 적잖은 위로였다. 몸이 회복되어 예전 기력을 찾을 만하니, 외숙부님이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유언 같은 말씀을 남기시고. ‘마음에 담은 일은 미루기보단 그날그날 해결해 두는 게 좋아.’
지금까지 정리해본 G 씨의 질문에 대한 답, 아니 답이랄 수 있을까 싶은 지금까지의 고민의 결과물들을공유하고자 한다.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고, 우리 아이들의 삶이 지금보다는 더 좋아지기를 소망하기에.
이 글을 읽는 분들과 함께, 답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을 마련해 본다는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