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들어진 정책은 세월이 지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정책일 것이다. 이런 정책이 많았으면 좋겠지만, 처음에 공감을 받던 정책이 나중에는 성토의 대상으로 변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보게 된다.
정책부서에 근무하면서 국가가 역량을 다해 만든 정책이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갈 수 있다는 사실에, 한 동안 의문에 휩싸였다. 이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중앙부처, 지자체, 공공기관에서 정책을 만들어 보았던 20여 명을 인터뷰 하였다. 그 결과는‘정책을 디테일하게 만들지 않으면 정책의 공감을 잃기 십상이다’란 점이었다.
그 후 국제기구에서 일하면서, 디테일만으로는 충분한 답이 아니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진국과 비슷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선진국의 지원을 받은 무수히 많은 개발도상국이 반백년이 지나도 제자리걸음인 걸 보고, 그 이유를 찾다보니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국제기구는기존의 도움으로 발전을 못하는
개발도상국을 지원하기 위해, 벤치마킹으로 실마리를 찾고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접하고도 한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다.우리나라에서 경험한 바, 수준이 높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정책이나, 시스템이 달라 우리의 현실과는 맞지 않은 외국 정책을 벤치마킹이란 이름으로 베끼듯 도입하면 득 보다 실이 크다는 사실을 체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기회가 되어 국제기구의 벤치마킹을 자세히 살펴보니 내가 알던 벤치마킹하고는 결이 달랐다. 타산지석과 유사하달까?
하나하나를 콕콕 집어 떠먹여 주는 것이 아니라, 성공사례와 실패사례를 보여 주고 이를 통해 스스로 의미를 체득하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학습을 통해 깨달아 가는 과정. 이런 벤치마킹이라면 맞지도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선진국의 훌륭한 정책을 도입했다며 자화자찬 하는 식의 벤치마킹 보단 부작용이 적고, 효과적일 것이다.
공감의 정책 1장은 국제기구에서 눈여겨본 벤치마킹 방법을 응용하여 꾸며볼 생각이다.
하지만 성공과 실패를 교훈 삼아 발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둔다. 나라의 흥망성쇠가 걸린 사건을 벤치마킹하고서도 배움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대략 기원전 473년 전후의 중국. 이 시기는 중국이 제후국으로 쪼개져 각국을 벌이는 춘추전국시대였다, 사건의 시작은 패권을 다투는 제후들의 모임장. 이 모임에 참석한 오나라 왕 부차는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될 꿈에 젖어 있었다.
그때, 오나라에서 밀사가 급히 도착하여 이웃나라 월나라가 불시에 침략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라가 위급한 지경이라는 말도 보고되었다. 이때 왕과 같이 듣던 대신 ‘백비’는 밀사의 목을 쳐버린다. 국가의 장래가 달린 외교정책이 결실을 맺는 마당에, 국왕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밀사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아서였다. ‘백비’는 밀사의 말보단 월나라를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백비’가 세운 국방정책, 외교정책은 월나라와의 신뢰를 기반한 것이었다. 월나라는 오나라 왕 부차에게 춘추전국시대 대표 미인 ‘서시’를 진상했고, 온갖 공물과 뇌물로 ‘백비’가 오나라 왕의 신뢰를 독차지하게 만드는데 도움을 준 나라였다. 이로 인해 오나라를 발전시킨 일등공신이자 ‘백비’의 라이벌인 ‘오자서’를 죽음에 이르게까지 했다.
귀에 듣기 좋은 말과 전설의 미인 ‘서시’로 왕을 현혹시키고, 충신 ‘오자서’를 죽음으로 이끈 ‘백비’의 활약은 오나라를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했고, 이는 기록으로 남아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백비로 인해 월나라에게 속았음을 알게 된 오왕 부차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백비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않았다.
동주열국지에서 이 대목을 읽다 보면, 국가의 위급함을 알리는 소식조차 무시한 ‘백비’와 같은 사람이 국가의 정책을 좌지우지했기에, 오나라가 망국으로 치달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백비’가 오나라에 해악을 끼지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내치지 않은 부차가 왕이었기에 오나라의 멸망은 필연이겠구나.라는 느낌도 있다. 조선시대 지식인도 나와 별반 다를 것 없는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1636년. 조선 국경.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가 올랐다. 오랑캐를 막는 국방정책을 수립하고 최전선에서 청나라의 침략을 대비하고 있던 도원수 김자점은 ‘오랑캐가 침입할 리 없다.’는 생각과, 공연히 잘못된 봉화로 한양에 있는 국왕의 심기를 어지럽힐 수 없다는 이유로 봉화가 올랐다는 사실을 바로 알리지 않는다.
이후 군관 신용이 청나라의 침입을 급히 보고할 때 도원수 김자점은 크게 노하여 군관 신용을 목을 치려하였다. 청나라가 침입할 리 없다고 믿었던 도원수 김자점은 부하의 말을 불신했기 때문이다. ‘백비’가 밀사의 목을 치는 장면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러나 다른 군관이 같은 보고를 하자, 그제야 한양에 청나라의 침략 소식을 알렸다.
인조 임금이 소식을 접했을 때는 청나라 병사들이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고 있는 상황. 임금은 결국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된다. 봉화를 제때 알리지 않았지만, 도원수 김자점은 자신의 역할을 하는 듯 보였다. 적들과 교전을 벌이고 임금을 구원하기 위하여 전국에서 모인 2만에 가까운 병사들을 통솔했으니. 하지만 경기도 양평 인근에, 전국에서 모인 병사들을 주둔시킨 후 대략 한달 간 꼼짝하지 않았다. 도원수 김자점이 움직인 건, 임금이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였다.
적국이 침입할 리 없다고 믿다가 기습당하고, 결국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었던 ‘백비’에 대한 기록에서 에서 얻은 교훈을 기초한다면, 도원수 김자점의 운명은 뻔해 보인다. 더구나 김자점은 청나라 군대가 한양까지 물밀 듯이 쳐들어 올 수 있도록, 대로에서 멀찍이 떨어진 산성 중심의 방어정책을 주장했고 실천한 사람이었으니.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도원수 김자점은 영의정까지 올라간다. 병자호란 이후에도 승승장구한 셈이다. 인조는 김자점을 죽을 때까지 신뢰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조 사후 김자점은 반역을 꾀하다 발각되어 사형으로 그 생을 마무리한다.
그런데 어떻게 김자점이 영의정에 까지 승진할 수 있었을까? 아부를 잘해서? 빽이 좋아서? 기록으로 판단하건데 김자점은 부지런한 사람이었고 국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 노력한 사람이기도 한듯 하다. 당대 최고의 군사전문가란 평도 있고. 그러니까 세간의 평이 좋은, 노력하는 엘리트의 모양새라고 볼수 있다. 그럼에도 국가 위기시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으로 대처했다. 이에 대한 책임은 물었어야 마땅했다. 이부분은 공감의 정책에서 중요한 부분인지라 다음에 좀더 깊이 있게 다루겠다.
공감할 수 있는 정책은 결국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 그러니 부차와 인조와 같은 임금이 통치하고, 백비와 김자점 같은 사람들이 승승장구하는 나라에선처음엔 공감이 가더라도 종국엔 국가에 해악을 끼치는 정책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벤치마킹이란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나, 활용하기에 따라 중요한 배움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의 기적 같은 경제성장도, 중국의 발전도 벤치마킹이 큰 도움을 주었다.하지만 우리의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이제 우리는 선진국이기에 보다 세밀해지고,보다 다양해졌다. 과거와 같이 베끼기식 벤치마킹은 도움되기 어렵다. 그에 따는 부작용을 체감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그러니 과거에 도움 되었던 벤치마킹 방식에서 벗어나는 노력이 필요할 시점이다.
여기서 제시할 벤치마킹 사례는 가능한 객관적 정보제공, 그리고 관련기관 또는 연구자의 해석을 알기 쉽게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둘 예정이다. 독자 스스로 판단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우리 자신과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정책을 바로 잡는 데 도움되는 실마리를 찾아가고자 한다.
참고 : 조선왕조실록 인조 14년, 15년, 병자록(나만갑), 산성 일기(작자미상), ‘17세기 전반기 조선의 대북방 방어전략과 평안도 국방체제’(노영구, 군사연구 135집), 병자호란(위키피디아), 동주 열국지(김구용, 8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