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정책 1. 일본 - 망언 정치인, 이케다 하야토
‘뭐라! 영장 없는 수색과 불심 검문, 압수 권한을 경찰에 부여한다고? 나라가 망해 온 국민이 추위와 배고픔에 떨었던 게 얼마나 지났다고 과거를 잊는 건가. 제국주의의 망령이 부활하는 것이나 진배는 짓을 정부에서 하다니’ 온 나라가 들끓었다. 여론은 바닥으로 수직낙하했다. ‘나라를 다시 망칠 생각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따위 법을 만들 생각을 하는 거야. 정부가 미친 것 아냐.’ 여기저기서 불만 섞인 말들이 터졌다. 나빠진 여론은 선거에 참패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정치인의 위기감은 정책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경찰 권한을 강화하기로 한 정부 결정은 없던 것으로 됐다. 반대급부적으로 정부가 경찰 권한 강화 카드를 꺼내게 한 빌미를 주었던 반정부 시위대는 용기를 얻었다. '우리가 정부에게 한방 먹였어!'
1950년대 후반기 일본은 시위가 만연된 시기였고, 시위 단골 메뉴 중 하나는 미일 안보조약(미일 안전보장 조약)이었다. 일본 정부와 미국 정부의 협약 하에, 미군은 자기 마음대로 일본 땅에 주둔하고, 자기 마음대로 군사행동을 일본 땅에서 할 수 있었다. 미국의 식민지가 아닌, 엄연한 독립국이자 중립국 일본에서 미군 마음대로 일을 벌여도 일본 정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이로인한 국민의 불만이 높아졌고, 눈치보던 정부에서 기껏 내놓은 건, 독소조항 몇 개를 바꾼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식의 새로운 조약안이 만들어져 국회를 통과한다는 소식은, 일반 시민을 분노케하여 시위에 가담하게 한다. ‘안보조약 폐지!’ ‘미군 철수!’
하지만 전쟁을 겪고, 패전의 아픔을 마음에 가로 새긴 기성세대 상당수는 그래도 지켜보자는 쪽이었다. 패전국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방문할 것이라는 계획과 이때 새로운 조약을 비준할 거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시위가 격화되고 있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국회 정문으로 진입하려는 시위대와 경찰에 대한 내용이었다. 혼란의 와중에 22세, 동경대 문과 3학년 재학 중인 여학생 ‘미치코’가 사망했다. 부검 결과는 흉부압박과 뇌출혈. 경찰 발표에 따르면 시위 도중 넘어져 발에 짓밟혀서 사망한, 그야말로 운이 없어 죽은 사고사였다. 정부는 무분별한 학생들의 폭력적 시위를 규탄했고 신문은 이 내용을 그대로 담아 내보냈다.
여론은 정부의 의도와는 반대로 흘렀다. '일본 최고 대학. 동경대에 재학중인 22세 꽃다운 나이의 여학생은, 사실 경찰이 죽인 것이다.'라며 야당은 일제히 정부를 공격하게 된다. 사람들은 정부의 발표를 믿기보단 '경찰이 여학생을 죽였다'는 야당 주장을 신뢰했다.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을 지경으로 확산되었다. 이것이 1960년, 일본 최악의 반정부 시위인 ‘안보 투쟁’의 실체다.
안보 투쟁만이 일본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한 건 아니었다. 안보 투쟁이 본격화되기 전 규슈 북부지역에 있는 미이케 탄광에서 파업이 발생했다. 광산 산업의 비전이 전과 같지 않을 거라 예상한 회사가, 약 1500명에 이르는 광부를 해고할 계획을 세운 게 발단이었다. 당시 노조는 강성이었고, 해고 계획을 들은 노조는 파업에 돌입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리 많은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안보 투쟁이 본격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미이케 탄광 파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고용한 깡패들이 탄광 광부들을 공격하였고, 광부들은 이에 대응하여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전국의 좌익 활동가, 우익 활동가가 미이케 탄광에 모여들었고, 정부도 만 명이 넘는 경찰병력을 동원하게 된다.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일본 열도가 말 그대로 어수선한 지경에 빠졌다. 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거의 침몰할 뻔 한 일본을 겨우 건져 올렸는데,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다시 침몰의 수순으로 갈 것처럼도 보였다.
이쯤 되자 여당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수상이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구원투수가 등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구원투수가 ‘급한 불을 끄고 바로 퇴장할 사람’으로 생각했다. 막말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정치인 이케다 하야토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유명한 막말을 소개해 보자면. 가난한 사람이 배고파하며 힘들어하자. ‘가난하면 비싼 쌀 대신, 값싼 보리를 많이 먹으면 될 것 아뇨!’란 말을 뱉었다. 인플레이션 억제책으로 소상공인이 살기 어렵게 되자, ‘소상공인 대 여섯 명 자살한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 아뇨’란 말을 거침없이 해댔다.
그런데 그는 취임 후 사람들의 선입관을 여지없이 깨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일단 옷차림이 변했다. 보다 신뢰감 있고 묵직한 옷을 차려입고 출근했다. 그리고 생각하기 여러운 일을 덥석 해 버린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상대 정당과 나눈다는 것은 정치인 입장에서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는 상대 정당의 노동조합 전문가인 이시다 히로이데를 노동부 대신으로 앉힌 것이다. 신임 이케다 하야토 수상은 신임 노동부 대신에게 미이케 탄광 발 파업을 평화롭게 해결하라는 주문을 하고, 같이 뛰어다녔다. 이런 노력으로 극도의 대치상태로 1년을 끌어오던 미이케 탄광 파업사태는 해결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미일 안보조약으로 극도로 혼란스럽게 된 정국을 해결하기 위해 꺼낸 카드는 경제였다. ‘10년 이내로 책임지고 두배로 잘 살도록 할 것이니, 믿어주세요.’를 외쳐댔다. 연평균 7.2%로 성장해야 달성 가능한 수치였다. 정책의 이름은 ‘소득배가정책’. 이 당시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패망의 충격을 어느 정도 벗어났다곤 하지만, 충분히 배부른 나라는 아니었다. 계속되는 시위에 지친 것일까. 아니면 새로운 수상의 열의에 감동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정부가 약속한 바를 따박따박 지켜나가서 인가. 아마도 모두 일 것 같다. 혼란스러운 정국은 점차 가라앉고 일본은 안정국면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는 프랑스 드골 대통령으로부터 ‘트랜지스터 세일즈맨’으로 불릴 정도로, 국가의 산업을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 그러니까 돈이 되는 산업으로 바꾸려고 노력했고 실천을 위해 뛰어다녔다. 전자제품 제조를 지원하고 중공업을 육성하고 수출에 박차를 가했다. 수출은 늘어나고 수입이 덜 되도록 외환을 관리하였다. 그러니까 나쁘게 말하면 환율조작에도 손을 댔다. 수출기업에 세제 혜택을 주고, 은행에서 수출유망기업에 투자를 촉진할 수 있는 길을 터줬으며, 수출을 잘하고 산업을 발전시킨 인물에겐 인센티브를 주었다.
이케다 하야토 수상은 약속을 지켰다. 다만 10년이 아닌 7년 이내에 소득을 두배로 만들어 버렸다. 연평균 10%를 웃도는 경제성장을 한 것이다. 일본 역사상 1960년대는 최고의 경제성장을 구가한 시기가 되었다. 이를 황금의 1960년대라고도 말한다.
파업을 잠재우고, 경제적 이슈를 들고 나와 정치적 혼란 상황을 해결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이케다 하야토 수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 실상 그는 원래부터 아이디어가 많고 업무능력이 탁월하다고 소문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 소득을 두 배를 늘려주겠다는 정책은, 정치인이 남발하는 공약 같은 게 아닌 경제학자 시모무라 오사무와 그의 팀이 차근차근 준비한 거란 사실도 밝혀졌다.
그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정치적 대결구도를 해소하고자 자세를 낮추고 화합을 외치며 다녔다. 그리고는 전임 총리가 추진하려 했던 '일본 군대의 부활'을 포기한다고 선언하면서, ‘군대 부활을 위한 개헌은 없다.’고 외쳤다. 이는 일본 사회당의 내세우던 정책이었다. 이런 조치는 한창 기세를 올리던 일본 사회당의 지지를 한풀 꺾이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미국과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 노력해,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방문을 성사시킨다.
그의 퇴임은 평범하지 않았다. 도쿄 올림픽 폐막 다음날 사임을 선언했는데, 당내 권력 투쟁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사토 에이사쿠를 후계자로 지정하는 조치를 취하고 나서였다. 그는 후두암에 걸린 사실을 수상 재임 중 알았다고 한다. 퇴임 후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일본인이 가장 공감하는 정책 중 하나로 보이는 ‘소득배가정책’, 이케다 하야토가 없었다면 세상에 빛을 발하지 못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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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하야토 수상, 그는 위기관리에 능한 지도자였다. 시위로 전국이 몸살을 앓고, 전국의 이목이 집중된 파업까지 겹친 시기를 무난히 잘 넘겼다.
이케다 하야토 수상에 대한 평 중 하나가, 통합의 코드였다. 수상이 되기 전 그는 망언을 일삼는 정치인, 그 이전에는 건방진 관료였다. 하지만 수상에 재직하면서 사람이 바뀌었다. 그의 자세는 낮았고, 공격보다는 화합에 힘썼다. 그러면서 필요하다면 상대편이 주장하는 내용을 과감히 받아들였다.
사람을 보는 안목, 사람을 쓰는 기술은 이케다 하야토를 공감하는 정책을 만들 수 있게 한 힘이 되었다. 사람을 잘 쓰자, 는 말은 쉬우나 실행은 결코 쉽지 않다. 현실 세계에서 능력 있어 보이는 사람 대부분은, 보고를 잘하거나 언변이 뛰어난 사람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보고를 뛰어나게 잘하지도 언변이 유창하지도 않지만,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상황 분석과 업무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충분한 역량을 발휘할 위치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이 있다. 이케다 하아토 수상은 본인이 아이디어가 많고 업무를 잘한 사람이었던 만큼, 일을 잘하는 사람을 고르는 안목이 높았을 거라고 본다. 이는 공감하는 정책을 만들 수 있는 토대를 형성했을 것이다.
경제학자 시모무라 오사무와 자신의 팀으로 일본 역사상 길이 남을 '소득배가정책'을 세운 건 대표적인 사례다. 적수일수 있는 상대당의 노동전문가를 덥석 국가의 요직에 임명하기도 했다. 더하여 이케다 하야토 수상은 소득과 함께 복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인물이다. 뛰어난 참모와 전문가, 실무자 없이 이런 업적은 불가능했을 거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