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회사원 유시로 씨는 지난날이 꿈만 같았다. 2차 세계대전에 패한 일본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일 때, 10대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식량은 부족하여 배를 곯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겨울이 오면 난방에 쓸 연료가 부족해 온 식구 오들오들 떨었던 때였다. 하늘에 떠있는 별을 따는 게, 좋은 일자리 잡기보다 쉬울 거라는 말이 나돌던 때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미국에서 ‘일본의 기적’이라 말했다는데, 그 말이 딱이었다. 믿을 수 없이 많이도 바뀌었다. 놀랄 정도로 발전을 이루었다. 유시로 씨는 그 혜택을 담뿍 받았다. 퇴직할 때까지 보장받은 일자리, 넉넉한 소득. 끼니 걱정, 연료 걱정하던 시절은 옛말이 된지 오래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과 일본, 프랑스, 독일, 영국이 모여 플라자 협약(미국 달러 가치를 낮추기 위한 협약) 이란 걸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유시로 씨의 가슴이 쭈욱 펴졌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 패한 지 40년 만에 당당히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과 어깨를 겨루는 나라가 된 것이다.
1985년 1달러에 237엔 하던 환율이 203엔으로 바뀌었다.
유시로 씨는 싱글벙글이다. 나라가 강대국과 어깨를 마주하고 난 후, 삶의 질이 달라지는 걸 체감했기 때문이었다. 수입에 의존하던 석유 가격이 싸지니 자동차 연료비가 적게 들고, 난방비도 줄었다. 프랑스산 와인이나 영국산 위스키 가격도 내렸다. 삶이 풍요로워졌다. 이대로 나라가 쭉쭉 뻗어나가면 유시로 씨의 꿈은 실현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외여행. 티브이에서나 봤던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같은 곳을 여행하는 게 어릴 적부터 유시로 씨의 소망이었다.
일본은행장 사토시 씨는 얼굴이 찌푸려지는 날이 늘었다. 수입품 가격이 14%나 낮아진 건 나쁘지 않으나, 수출로 먹고사는 일본 입장에선 마냥 좋다고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창 히트를 치고 있는 소니 워크맨 해외 판매 가격이 147달러에서 173달러로 올랐다는 소식이 들어왔을 땐,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일었다. 하지만 경기가 좋아지고, 부동산 가격이 들썩이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은행 이자율을 조절하는 중추 은행인 일본은행이 가볍게 움직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토시 씨는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1986년, 환율은 1달러에 203엔에서 163엔으로 된다.
유시로 씨는 싱글벙글이다. 드디어 겨울 휴가기간에 유럽에 갈 계획을 세웠다. 이렇듯 용기 내어 유럽여행을 가게 된 까닭은 작년 연초만 해도, 237,000엔 하던 유럽행 왕복 비행기 가격이 163,000엔으로 떨어진 탓이 가장 컸다. 거기에 숙박비와 같은 현지 체재비까지 모두 내렸으니. 이만하면 일본 국내 여행을 하는 것보다 비싸지 않았다. 오히려 유럽에 도착하면 일본 현지보다 더 싸니, 선물 구입에 유리했다. 사무실 자투리 시간에 신명 나게 여행 계획을 짜고 있는 데, 친한 동료 한 명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요새 부동산 가격이 들썩이는 데, 여행 갈 돈으로 차라리 부동산 투자를 하는 게 어떠냐는 소리를 했다. 부동산이 들썩이는 건 사실이나, 이건 평생이 소원이었다. 그러니 포기할 수는 없었다. 유럽여행의 짐을 꾸렸다.
사토시 씨는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173달러에 팔던 워크맨 가격이 215달러로 오르자, 판매량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핫한 아이템인 워크맨이 이지경인데 다른 물건은 볼 것도 없었다. 금리를 5%에서 3%로 내렸다. 기업들이 싼 이율의 돈을 빌려 생산설비에 투자하여 생산단가를 낮출 수 있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되면 수출이 회복될 거라 보았다. 워크맨 가격은 200달러 미만으로만 해놔도 일단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본의 기술력은 세계 최고로 올라섰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운은 언제나 일본에 미소를 보냈다. 마치 신이 보호하는 나라인 것처럼. 사토시 씨는 그런 일본을 믿었다.
평생소원인 유럽여행을 만끽하고 돌아온 유시로 씨는 매일 신문을 보고, 티브이를 보면서 부동산 정보를 모으게 일상이 돼버렸다. 부동산에 투자하라고 조언했던 동료가 구입한 땅이, 몇 달 새 50%나 오른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배가 아팠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건 완전히 돈 놓고 돈 먹기였다. 차라리 여행을 가지 말고 그 돈으로 부동산을 샀더라면, 나중에 퇴직해 한가할 때 그 부동산을 팔았더라면. 유럽여행이 아니라 전 세계 일주도 가능해 보였다. 다행히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목돈이 따박따박 들어오는 직장인 신분이 아직 몇 년이 남았으므로. 게다가 은행금리가 낮아졌다는 소식도 접했다. 집을 담보로 돈을 융통해 부동산에 투자하면, 되는 것이었다. 정년퇴직을 하면서 받을 퇴직금으로 빛의 일부를 갚고, 사모은 부동산 한 귀퉁이를 팔아 나머지는 해결해도 노후를 안락하게 보낼 자금이 충분히 마련될 것처럼 보였다. 유시로 씨는 마지막 여유까지 탈탈 털어 고향 오사카에 부동산을 매입했다. 1986년 한 해 동안 도쿄 주거지역 평균 가격은 45% 상승, 상업지역은 평균 122% 상승했다.
1987년, 환율이 1달러에 163엔에서 128엔으로 바뀌었다.
수출에 빨간불이 켜졌다. 기업은 생산설비를 늘리고 기술을 혁신하는 데 투자를 했다지만 단기간에 이렇게 환율이 급변하니, 답이 없었다. 수출이 안 된다며 직원을 해고할 수는 없는 일. 평생고용을 하기로 했으니. 일본은행 사토시 은행장은 부랴부랴 금리를 3%에서 2.5%로 내리는 데 사인했다.
유시로 씨는 신명이 났다. 예상이 적중했기 때문이다. 오를 대로 오른 도쿄가 아닌 오사카에 부동산을 매입한 게 적중하였다. 몇 달 지나지 않았는 데도 회사에서 1년간 일해서 번 돈 보다 부동산으로 얻은 수익이 좋았다. 유시로 씨는 머리를 굴렸다. 금리가 더 낮아졌으니, 부동산을 담보 잡아 다시 돈을 빌렸다. 아직까지 부동산 구입을 망설이는 친한 지인에게 조언을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같이 잘되면 아무래도 좋을 테니. 부동산이 패할리는 없는 것이다. 땅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일본이 망할 것도 아니니까.
1988년 환율이 1달러 당 128엔에서 124엔이 되었다. 1985년부터 계산하자면 환율이 1달러당 237엔에서 124엔이 된 것이었다.
저금리에도 수출 사정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본 경제를 지탱하던 수출동력이 떨어졌다는 우려가 돌았다. 그럼에도 부동산 가격의 상승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돈이 돌다 보니 인플레이션의 우려도 높아졌다. 더하여 불만의 소리도 높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뼈 빠지게 일해서 돈을 벌어도 집을 장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사람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이미 집이 있는 장년층과 노령층은 큰 불만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청년들과 집을 사려고 열심히 돈을 모으던 사람들에겐 큰 타격이었다. 부익부 빈익빈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돈만 있으면 아무 노력 없이 평생 떵떵거리고 살고, 돈이 없으면 평생 죽어라 일을 해도 집 한 채 장만하지 못하는 그런 시대. 여론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일의 책임자였던 사토시 은행장은 물러나게 된다.
1989년 야스시 신임 일본은행장이 손댄 일은 부동산 잡기였다. 어차피 수출은 기술혁신으로 해결할 일,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기업은 자산이 충분하니 높은 금리에도 버틸 수 있을 듯 보였다. 금리를 2.5%에서 4.25%로 올렸다. 때를 맞추어 일본 정부는 소비세를 도입했다. 빈부의 격차를 줄이고, 복지를 늘리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서민들은 신임 야스시 은행장의 조치에 박수를 보냈다.
유시로 씨는 신경이 쓰였다. 금리가 엄청나게 오른 것이다. 은행에서 빌려다 쓴 금액이 제법 되는지라, 이자가 월급의 80%까지 차올랐다. 아무래도 부동산을 처분해야 하는 건가 싶어 주변을 보니 부동산 가격은 여전히 강세. 월세가 따박따박 나온다는 도쿄의 상가를 구입하는 게 현명한 듯 보였다. 도쿄의 상가는 연금통장과도 같은 든든한 물건이었다. 아무리 은행 금리가 오른다고 해도, 버틸 수 있는 지지대가 돼줄 것이었다.
1990년. 금리인상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 야스시 은행장은 또다시 칼을 빼들었다. 은행금리를 6%로 올렸다.
유시로 씨는 자신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다는 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쿄의 상가에선 월세가 따박따박 나왔다. 덕분에 은행이자 걱정은 덜었다. 아무래도 도쿄 상가를 더 사들여야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혹시 모를 불안에 주변을 돌아봤다. 부동산 가격은 오르지도 내리지도 안는 상황. 부동산 불패라는 말을 마음에 가로새기며, 도쿄에서 구입할 상가가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1991년. 1달러에 130엔. 아무래도 수출 회복은 어려웠다. 수출물량이 5년째 내리막이니 회사에겐 지금껏 투자한 과잉시설이 부담이었다. 높아진 금리에 은행 이자를 감당하기에도 벅찬 사업장이 속출했다. 그럼에도 인건비 지출은 줄일 수 없으니. 수출로 먹고사는 회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임대료가 비싼 도쿄의 사무실을 빼는 것 정도였다. 망한 회사 또한 도쿄 사무실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도쿄 사무실이 비기 시작했다. 경기가 계속 나빠지니, 상품 가격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떨어지는 디플레이션이 우려됐다.
유시로 씨는 돌아가는 분위기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는 낌새를 느꼈다. 자신이 다니는 건실한 회사가 기우뚱거리고. 도쿄 상가가 비어 가고. 이때는 얼른 부동산을 처분하여 현금을 확보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일단 은행빚부터 정리하자는 생각으로 도쿄 상가를 포함해서 부동산의 절반을 내놨다. 시장에선 부동산 가격이 계속 내려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시로 씨는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구입할 때보다 많게는 3배 넘게 오른 부동산도 있으니, 더 떨어지기 전에 팔면 되는 거였다. 그리고 신은 일본을 버릴 리 없으니.
부동산이 폭락하고 기업의 부담도 높아지니, 일본은행으로선 금리를 다시 낮추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번 내려가기 시작한 부동산 가격을 멈출 수도, 이미 과잉투자가 문제가 된 기업을 바로 세울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부실 융자를 과도하게 낸 좀비은행, 정부의 지원으로 목숨을 연명하는 좀비기업이 늘어나고. 부동산에 과잉 투자한 개인들의 파산이 속출했다.
1991년부터 2003년까지 일본은 연평균 1.14% 성장이라는 극도로 낮은 성장을 보이게 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우리나라 전자제품 회사가 일본을 누르기 시작했고, 세계 제1의 회사로 발돋움하게 된다.
위의 일본의 예 처럼, 잘 나가는 나라더라도 변화에 잘 못 대응하면 나락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
일본을 장기침체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데 두 은행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분석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논할 때, 감초처럼 등장한다. 물론 다른 평도 있다. 미에노 야스시 은행장의 경우, 서민을 위한 집값 안정에 기여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장장 30년 동안의 장기침체다. 그 사이 한참 아래로 내려다봤다. 한국에게도 따라 잡히게 되었다. 양질의 일자리는 사리지고, 파트타임이나 임시직이 늘었다. 더 이상 일본을 기적을 이룬 아시아 최고의 국가로 보지 않는다. 몇 발만 더 나가면 미국을 넘어설 수 있는 나라는 더 이상 아닌게 되었다. 이런 거대한 실책에 대해선 응당한 책임이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 돈 몇만 엔 받아도, 가차 없이 공무원을 엄벌하는 일본의 정의에 따르면, 더욱 그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 이 두 은행장이 받은 불이익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들의 마지막 명함은 일본 유니세프 회장 스미타 사토시, 교린대학 대학원 국제협력연구과 객원교수 미에노 야스시였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패배한 원인 중 하나가, 신상필벌에 대한 기준이 모호해서라는 평가가 있다. 풀어쓰자면 승리할 때는 상을 주지만, 실수할 때는 그에 합당한 벌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군대들이 성과에 눈이 멀어 제멋대로 행동한 경우가 많았다. 상에만 급급하고 벌에 관대하다 보니 지휘관은 무모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30년이 넘어도 장기침체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와 같은 문화의 영향일 수도..
여기서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일본의 최고 정책결정자는 수상일진대, 어떻게 일본은행장에 대해서 책임을 그리 많이 물을 수 있냐는 의문이다. 은행장은 깃털 정도 아니겠냐는 의심도 들만하다. 하지만 당대 상황을 집어보자면 1985년부터 1993년 9년 동안 일본 수상 5명이 교체된다. 악화되는 경기, 널뛰는 집값, 디플레이션, 이런 변화와 위기 속에서 내각책임제는 제 역할을 하기 힘들었다. 상대적으로 일본은행장의 힘이 상당했을 거라는 합리적 추정이 가능할 것이다.
설사 수상의 권한이 막강하다 해도 경제의 큰 축을 담당하는 기관의 수장의 발언의 힘은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두 명의 일본은행장이 경제학도가 아닌 법대 출신이긴 했다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