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웃음을 나게 하는 비상 전화가 왔다. 엄청난 방사능이 유출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어떤 덤벙이가 수치를 제대로 못 읽고 보낸 메시지가 분명했다. 1.001을 1001로 읽는, 뭐 이런 상황이겠지 싶었다.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을 보고하면 비웃음만 살 터였다.무시하기로 했다.
몇 시간이 지나고 비상전화에서 벨이 다시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요약하자면 원자로가 녹을 지경이라는 것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까 메시지가 실수가 아니었나!' 상대편은 이 사실을 주민들에게 알리고 대피시켜야 한다고 했다. 일단 알았으니, 잠시 후 답해주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런 중차대한 일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허겁지겁 팀장에게 달려가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팀장은 한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당신이 원자로가 녹는 걸 확인해 봤어? 원자로가 아이스크림도 아니고 그리 쉽게 녹는 건가? 제대로 사실 관계를 파악하지도 않고 주민들에게 알리면 그 후의 일은 어떻게 책임질 거야! 공포와 혼란에 빠진 주민을 어떻게 달래느냔 말이지! 똑바로 알아보고 다시 보고하고, 발전소에다 전화를 해서 사실이 확인될 때까지 헛소리 하지 말고 잠자코 있으라고 그래!"
머리를 까웃거리며 자리로 돌아왔다. 팀장의 지시 내용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촉이 그건 아니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시는 따라야 하는 것. 발전소로 전화를 걸어 함구령을 내렸다. '사실이 제대로 확인될까지 헛소리 말아라.'는 메시지를 그대로 전했다. 잠시 뒤 벨이 울렸다. 이번엔 난감한 질문이 쏟아졌다. 당장 원자로를 식혀야겠는데, 급한 대로 바닷물을 끌어 쓰겠다는 것이었다.
원자로에 소금물을 부어 열을 식힌다? 뜨거운 유리에 찬물을 부으면 금이 쩍쩍 갈라져 깨지는데. 엄청나게 뜨거워졌을 원자로에 차디찬 소금물을 끼얹으면 어찌 되나? 혼란스러워진 머리 한구석에 상사의 한심한 눈초리가 떠올랐다.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전까진 아무런 결정도 내려선 안 되는 것이었다. 일단 팀장에게 달려가 발전소에서 한 말을 전하고, 전문가를 찾아 대응하겠다고 보고했다. 이번엔 팀장도 긴장한 듯 보였다.
"음,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은 모양일쎄. 전문가를 찾아 확인한 다음 답을 해주게"
그러나 이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재난상황을 알만한 전문가를 한 순간에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곳저곳 수소문한 끝에 전문가를 알아내 전화했다. 자초지종을 말하자 다급한 답변이 돌아왔다. "아니 지금 똥오줌 가릴 때요. 바닷물이건 시냇물이건, 무조건 원자로를 식혀야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계를 내려 보았다. 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제발 원자로가 잘 버텨주길...
옆자리에 있던 동료가 원자로가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방사능 유출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잠시 머리를 돌로 맞은 듯 멍해졌다. 신중하게 일 처리한다는 게 이런 사단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팀장과 팀원 모두 우왕좌왕하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는 데, 미국에서 연락이 왔다. 붕괴된 원자로에서 방사능이 퍼져나가는 데이터를 정리해서 주겠다는 것이었다. 하늘에 인공위성을 촘촘히 띄어놓은 미국은 이미 모든 상황을 파악한 눈치였다. 이번에는 주저 없이 고맙다고 하고 데이터를 받았다. 그러나 이 데이터를 관리하는 건 우리 팀의 역할이 아니었다. 관련될 것 처럼 보이는부서로 연락했다.
"원자로가 녹아내리고 있데요. 빨리 비상대책을 만들어서 피해를 줄여야 합니다. 미국 자료로 확보했으니 도움되실 거에요."
당황스러운 대꾸가 들려왔다. "어... 그건 우리 팀 업무가 아닌 것 같은데요?"
관련될 것 같은 팀에 연락을 하면, 모두 발을 빼는 답변이 되돌아왔다. 하긴 이런 재난상황에 발을 담그기는 싫겠지. 그러나 어찌하겠나.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재난 담당 부서 찾기'는 탁구공처럼 이리저리 튀어 다녔다.
그 사이에 피해지역 주민들이 방사능이 퍼져나가는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방사능에 피폭되지 않았을 주민들이 정보를 제때 주지 않아 방사능에 오염돼버린 것이었다.
아차 싶었다. 담당을 결정하기 전에 방송국에라도 자료를 넘겼더라면.. 하지만 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권한도 없는 사람이 방송국에 그런 중요한 자료를 넘기면 나중에 문책을 당할 소지가 있었다. 감사를 받을 수도 있고. 이 일을 잘못 대응한 책임자로 몰려 잘릴지도 모르고.
어차피 혼자서 모두 해결할 수 없는 일. 독박쓰는 일은 면해야 했다. 최소한의 할 일만 하고 나머지는 담당자를 찾아 떠 넘기기로 했다.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국민들의 비난이 빗발쳤다. 책임자를 문책해야 한다는 말이 터져 나왔다. 비상대책회의가 열렸다. 회의장에는 억울하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사실, 이번 사건은 해당 발전소의 어리석은 결정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전문가들이 몇 번이나 이런 사태를 경고했었다. 그럴 때마다 발전소는 무시로 일관했다. 이런 무지와 나태한 안전 의식의 결과물이 원자로의 붕괴였다. 똑같은 상황에 처했던 옆 발전소가 멀쩡하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었다.
2011년 거대한 쓰나미가 원인이 되어 붕괴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제2의 체르노빌. 가까스로 경제를 일으켜 세우고 있던 일본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경제 침체 기간이 20년에서 30년으로 늘어나는 단초가 되었다. 결국 일본은 원전사고 수습을 위해 막대한 국고를 탕진하고, 나라 빚도 늘게 된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커져 국가 발전의 발목을 잡은 이유는 천재에 인재가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초동대응을 적절히 했더라면 피해를 줄일 기회가 몇번이고 있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당시 일본 수상이었던 민주당의 칸 수상과 노다 수상을 연이어 바꾸어 버렸다. 사고의 책임으로 칸 수상이, 사고 수습의 어설픔으로 노다 수상이. 그리고 뒤를 이어 공화당의 아베수상이 등극한다.
21세기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대통령을 탄핵시킨 비극이 있었다. 세월호 침몰 사고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해상 조난사고를 대응하는 체계를 바꾸었다. 제2의 세월호를 막자는 취지였다.
해양사고 통계를 들추어 보았다. 해수부 해양안전심판원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3년 해양사고 사망자는 62명, 실종자는 39명. 2014년 세월호 당시 해양사고 사망자는 404명, 실종자는 63명.
2020년 해양사고 사망자와 실종자는 얼마나 줄어들었을까. 사망자는 88명, 실종자는 38명이다. 찝찝한 수치다.
https://www.kmst.go.kr/kmst/statistics/annualReport/selectAnnualReportList.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