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가져온 꿈이 있다.
해외에서 박사를 마치고 학자로서의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것이 그것이었다.
선배 박사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우리나라 여성으로서 박사 학위를 딴다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더구나 해외에서 그것을 성공적으로 쟁취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배워왔다. 같은 과 석사 선배들 중 연인이 있던 남자 선배들은 결혼을 해서 아내를 데리고 유학길에 올랐지만 여자 선배들 중 그런 경우는 볼 수 없었다. 오히려 훌륭한 자질을 가졌지만 박사 유학을 포기하는 여자 동기와 선배들이 많았다.
그래서 더더욱 결심했었다. 나의 커리어에 결혼이나 가정이 장애물이 될 수 없다고. 그리고 운 좋게 그런 생각을 존중해주는 사람을 만났다.
해외에서 나가 살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던 사람이 다른 사람 때문에 생각을 바꾸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린 각자의 꿈을 존중하기로 했지만 사실 입장을 분명히 했던 것도, 설득하는 쪽도 나였던 것 같다. 독일에 가는 조건은 내가 장학금을 받는 것이었고, 남자 친구가 결심하기까지는 3년의 시간이 걸렸다. 태권도를 하는 남자 친구는 독일에 가면 당장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더라도 오래 본다면 천천히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 둘 다 남자 쪽에서 가사를 맡는 것에 대해 아무 반감이 없었고 오히려 나는 그 편이 나았다.
결국 장학금에도 합격했고 우리 둘이 합의도 보았다. 내가 중간에 아프게 되어서 1년을 또 기다렸지만 좋은 결과도 나왔다. 이제 해피엔딩만 남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부모님의 생각은 달랐다.
부모님은 '경제적 능력 있는 어엿한' 사위를 바랐고, 그건 한국에서건 독일에서건 상관없이 즉시 발동되는 능력이어야 했다. 아버지는 '남자라면 처자식 먹 여 살릴 능력이 있어야 한다' 고 하셨다. 내 친구 A는 경제능력도 없는 20대 초반에 여자 친구와 결혼해 부모님 돈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는데, 나는 내 힘으로 결혼해 유학하겠다고 해도 가족들이 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놈의 가부장제가 또 한 번 이렇게 내 뒤통수를 쳤다.
직녀의 부모는 그까짓 남의 집에서 소부리는 놈한테 딸을 준단 말이냐고 그들의 사이를 가르기 위하여 근읍 어느 친척의 집으로 직녀를 보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XX에서 비단 짜는 여직공을 모집하러 온 사람이 있다...
"돈 모아 응."
직녀는 떨리는 소리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견우는 울타리를 비집고 직녀의 손을 잡았다. 두 손이 바르르 떨었다.
"오냐. 이를 갈어붙이구 돈을 모아, 오년만 참어라."
"응, 나두 그새 돈 모께."
"응, 너두 모아라. 나두 모구."
"그러구 일 년에 한 번씩 만나러 와요."
[채만식 (1933) 팔려간 몸, 한국저작권위원회]’
책이 나온 지 거진 80년이 지나오는데도 우리나라는 어쩜 이리도 바뀌지 않을까. 아직도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이나 명예 훈장쯤으로 생각하는 부모가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분리하여 생각하고, 각자 성에 다른 책임을 지운다. 남자가 여자를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breadwinner)이듯, 여성은 어머니가 되어야 했다. 그것도 아들의 어머니가 되어야 했다. 그렇기에 8-90년대에 태아 살해가 공공연히 벌어졌다. 수많은 여자 아이들은 세상에 발을 디뎌보지 못하고 엄마의 뱃속에서 눈을 감았고 많은 부모들은 공범이 되었다. 지금 시대 여성에게는 또 다른 책임이 생겼다. 우린 모성을 가져야 하며, 또 여러 면에서 '아름다워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불필요하고 너무나 많은 희생을 요한다. 우리네 부모님은 직녀가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알고 있을까.
오늘날 여성과 남성은 각자 다른 상황을 마주친다. 사회의 고정관념에 아직까지 갇혀있기 때문에 그들의 결합은 당사자뿐 아니라 주변인들에게도 혼란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여성이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따른 비난이, 경제활동이나 자기 계발에 게을렀다면 또 다른 한편에서의 힐난이 쏟아질 것이다. 남성은 남성대로 여성이 노동시장에 더 활발히 진출 한만큼 자신의 '가족부양' 책무도 줄어들었을 것이라 기대했겠지만 놀랍게도 남성을 바라보는 인식은 별로 변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가족들에게 전통적인 젠더 역할이 아닌 대안을 제시했을 때 이토록 큰 저항이 돌아왔다.
여자 친구들과도 ‘남성의 경제력’에 대한 토론이 오고 갔다. 여섯 명 중 적어도 네 명은 남성이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놀라운 반응이었다. 적어도 우리 세대 여성들에게서 기대한 대답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은 얼마나 바뀌지 않는가. 아직도 진부한 이야기는 길을 잃은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남자가 경제력이 없으면 자존감이 떨어져서 바람을 피운대’ 이런 강아지 방귀 같은 논리 말이다. 영화 ‘인턴’의 유능한 CEO 앤 해서웨이가 바람피운 남편에게 당한 그 가스라이팅과 같지 않은가. 그건 당신 남편이 주부이기 때문이 아녔다고, 앤 당신이 남편보다 능력 있는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고. 그건 남편의 문제이지 당신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때 그 영화관으로 돌아가 큰 소리로 알려주고 싶다.
나에겐 '돈 잘 버는' 남편보다 내 옆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앞으로 적어도 10년은 어느 나라에 정착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나를 떠나지 않고 함께 있어줄 수 있는 남자는 많지 않을 거다. 가정을 가진 나의 여자 선배들에게 '해외 박사'라는 선택지가 없었던 것처럼 내게도 그런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런 나의 선택은 아주 소수의 생각일 뿐이고 가족들에게 나는 이해 못할 존재 같다. ‘결혼하면 남자가 여자를 먹여 살려야지’ 이 말이 내게 얼마나 냉정하고 위선적인 문장이 되었는지.
아직도 나는 결혼이 내게 좋은 답안지인지 결정하지 못했다. 다만 나의 남자 친구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과, 돈이 우리의 관계를 결정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올 때 우리의 관계가 깨어질까 봐 두려운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그것이 돈이라는 값싼 이유 때문이라면 너무나 서글플 것 같다. 우리의 선인들이 남자의 재력에 그토록 목을 맨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그때 그 가부장제가 만연하던 사회적 환경 때문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제는 그 벽을 부수고 다른 길을 만들어 걸어가야 하는 시간이 왔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