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유학을 시작하는 초행길은 설레기도 했지만 걱정이 앞섰다. 여러 번 해봤어도, 그때는 좋은 결말이었어도 새롭게 시작하는 길은 다시 또 외롭고 어려울 것이라는 걸 빤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않겠지만, 나는 늘 그 시간이 두려웠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 떨어진다는 것은 차가운 느낌이라는 것, 새로운 곳에서 처음 맞는 밤은 혼자라는 서늘함이 가장 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유학을 시작하면 얼른 사람들을 사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건 정말이지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모든 좋은 사람들에게 내가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할 때도 있고 우리의 인연이 뚝 그치게 될 때도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관계가 있을 때도 있다. 스무 살 새내기 때 갔던 호주에서는 바로 내가 그 "좋은"사람이 되지 못했다.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조금은 무섭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마음도 모자라서 벽을 쌓았다. 대학생 고학년이 되어서 갔던 영국에서는 조바심을 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알고 그들과 더 친밀한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내 마음을 순수하게 받아준 사람도 있었지만 조바심은 관계에서 별로 유용한 것이 아니었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십 대를 거치면서 영국에서 만난 친구들과 꾸준히 연락을 하고, 만나기도 하면서 우린 함께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시간은 우리의 관계도 더 성숙하게 만들어 주었다. 영국에 있었을 때는 더 자주 봤지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시간이라는 신뢰를 쌓으면서 가끔 만나는 사이가 되었을 때에도 이제는 할 수 있게 되었다.
글쎄. 내가 독일이 아닌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공부했다면 어땠을까. 지금과 같은 관점을 가질 수 있었을까? 독일에서 우정은 특별한 것 같다. 하루 이틀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 두고 보면서 켜켜이 쌓여간다. 한국에서의 우정도 물론 그렇지만, 이곳에서는 더 오래 기다려야 하고 인내심을 가져야 하는 것만 같다.
유학 중에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같은 학생 신분의 지인을 만날 확률이 높다. 처음 학기를 시작하면 무슨 생각이라는 것을 할 여유도 없지만, 몇 학기를 보내다 보면 지금 함께 있는 친구 혹은 지인의 졸업이 얼마나 남았는지 헤아려 보게 된다. 그리곤 문득 '얼마 후면 내가 혼자 남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국에서는 1년의 시간을 교환학생으로 지냈는데, 그동안 다른 교환학생, 학부생, 석사, 박사생을 골고루 사귈 수 있었다. 그들도 지금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나이가 들고 경험을 해봤다는 건 여러 면에서 유용한 것 같다. 그런 걱정을 하다가도, 그 시기가 오면 내게 찾아오는 새로운 인연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기도 하고, '까지껏, 아무도 없으면 어떠냐'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내게 주어진 일이 넘쳐날 때는 할 일에 충실하다 보면 사람도, 일도 모두 해결되기 마련일 거라는 마음이다.
예전 같으면 누군가와 관계가 단절되는 마음이 들 때 불안감을 느꼈을 텐데, 이제는 모든 것이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 사람과의 관계는 그때로 충분했고 이젠 우린 서로 다른 범위 안에 살고 있으니, 나는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다.
모든 것이 끝까지 남는 관계일 수는 없고, 가끔은 노력이 배신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알지만 인정하기 어려울 뿐이지. 그래도 유학이라는 길에서 만나는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인연을 맺기도 하고, 이미 함께하는 친구들과의 관계를 잘 가꾸어 간다면 앞으로의 시간에서도 함께할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