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고 독립적인 개체로 살기 위한 기본 조건
나의 한 달 수입은 한국돈으로 백오십만 원 정도이다. 수입이라 하긴 조금 뭐하고 장학금으로 받는 돈인데, 이 돈으로 독일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
가끔 독일의 물가를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지레짐작으로 우리나라보다 물가가 비싸지? 하고 물어보기도 한다. 물론 서비스가 들어가는 품목은 비싸지만, 공산품, 생활용품, 식재료, 심지어 집세까지 한국보다 저렴한 편이다. 아직 세금을 내지 않는 유학생인 내게 더더욱 이곳의 물가가 친절하게 느껴진다. 물론 지역마다 집세는 차이가 크다. 그렇지만 내가 사는 B 도시는 독일 내에서도 집값이 안정적인 편이다. 독일도 집값이 오르고 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는 내 한몸 뉘일 집을 마련할 정도는 된다. 함께 사는 친구와 집값을 반으로 나누어 내게 되면 더 좋다. 그만큼 좀 더 넓은 집에서 반절의 집세만 내면 되니까 말이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WG(공동 주거)가 흔하다. 보증금도 보통 한 달치 월세, 혹은 두 달치만 내면 된다.
한국에서 파트로 연구소에 근무한 적이 있다. 일주일에 3일 출근하는 회사였는데, 지금 내가 받는 돈 정도를 받았다. 그 돈으로 생활하는 건 너무 빠듯했다. 비싼 한국 수도권에서 살기엔 부족한 월급이였다. 심지어 부모님 집에서 살았지만 한 달에 150만 원 넘는 돈을 생활비로만 써도 모자라다는 것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강아지 두 마리에 대한 지출이 대부분이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아도 한국에서는 돈이 줄줄 새는 느낌이었다. 그때는 친구들과 한번 만나면 몇만 원의 돈이 쉽게 나갔고, 식비로도 꽤 많은 돈을 썼다. 거기에 만약 독립해 살았다면 어땠을까? 내가 살던 지역 오피스텔 원룸의 기본 월세가 적게 잡아 6-70만 원이라고 생각해 보아도 난 이미 파산했을 거다. 아니, 독립은 오랫동안 꿈도 못 꾸었을 거 같다.
독일에서 내가 자주 가는 마트는 Lidl이다. 독일에서 큰 마트는 몇 개가 있는데, REWE, Lidl, Aldi, Netto, Kaufland 정도가 있다. 그중 Lidl, Aldi, Netto는 저렴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Lidl이 우리 집에서 가까워서 자주 가게 된다. 유기농 제품도 별로 비싸지 않고 일반 제품, Lidl 브랜드 제품은 더 저렴하다. 위의 사진은 일주일치 먹을거리인데, 이날은 친구가 방문한다고 해서 평소 내가 먹지 않는 음식까지 더 많이 샀던 것 같다. 이 정도 사면 우리 돈으로 3만 원 정도가 든다. 유기농 제품도 사고, 다른 음식도 꽤 풍족하게 샀지만 가격은 그리 많이 나오지 않았다. 나처럼 풍성하게 먹지 않는 다른 유학생(!!)들은 한 달에 식비로 100유로만(13만 원 정도) 써도 살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가난한 학부생들은 집세까지 포함해 한 달에 8-90만원으로 살아남기도 한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평소에도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함께 요리를 만들어 먹는 걸 좋아한다. 이건 영국에서도 많이 했던 건데, 요리를 해 먹는 것이 나가서 사 먹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게 들기 때문이다. 난 김치도 집에서 간단히 만들어 먹기 때문에 돈을 더 많이 아낄 수가 있었던 것 같다 (김치는 비싸니까). 한국 음식을 먹고 싶어 식당에 가는 친구들이 종종 있는데 한 끼에 2만 원은 기본으로 나오니 내게 한식은 무조건 집에서 해 먹는 요리가 되었다.
강아지 용품도 대부분은 한국보다 저렴하다. 물론 동물병원에 가면 우리나라보다 더 많은 지출을 하겠지만, 강아지 사료, 간식, 장난감, 강아지 약 등은 거의 2배 정도가 저렴한 것 같다. 이상하게도 똑같이 미국에서 수입해 오는 강아지 사료(같은 브랜드)인데 한국에서는 3만 원이 넘는 금액을 지불했고, 이곳에서는 14유로 (한화 약 18000원) 정도면 살 수 있었다. 사료나 간식은 특히나 금액차가 많이 나는데 기본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금액 자체가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강아지 세금이 높기 때문에 일 년에 강아지에게 드는 돈은 독일에서도 많지만, 동물병원만 가지 않는다면 다른 곳에서는 많이 절약할 수 있다. 동물병원 문제도, 지금 우리 강아지들이 다니는 병원은 보통 2주 전에 예약을 해야 진찰을 받을 수 있는데 진찰받기 전에 강아지가 괜찮아져 버려서 의도치 않게 병원비가 굳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 달에 백오십만 원 정도의 돈을 받지만 생활비로는 넉넉하고, 저축도 할 수 있다. 코로나 때문에 여행도 못 가니 은행 계좌에는 돈이 더 모인다. 이렇게 평소에 드는 돈이 적어 취미생활이나, 마음을 여유롭게 해 주는 지출도 가능하게 된다. 좋아하는 식물도 사니 흐린 날씨에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한 나라의 물가는 사람들의 삶의 질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저소득층이 많은 영향을 받는다. 저소득층에서는 비만 아동이 발생할 확률이 높은데, 그건 소득이 적을수록 저렴한 식재료를 살 수밖에 없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 슈퍼만 가봐도 과일, 채소보다 냉동식품이 더 저렴하다. 물론 독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최소한 빵(이곳에서의 주식)과 과일, 채소가 저렴하다면 건강한 식재료의 접근성이 더 높아지지 않을까.
몇 년 전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환경오염과 장보기'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친구에게는 유기농 제품, 친환경 제품이 사치품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아무리 환경오염을 하고 싶지 않아도 내 생활이 빠듯하니 그런 비싼 물건을 살 여유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이해가 됐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친환경 제품 (정말로 친환경인)은 평균적으로 너무 비쌌다. 난 한국에서 한살림을 자주 이용했는데, 채소 같은 경우는 좀 저렴할 때도 있었지만 다른 제품은 평균적으로 더 비쌌다. 해외에서도 유기농, 친환경 마크가 붙으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제품보다는 더 비쌀 때가 많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친환경 제품이 '살 만한 가격'인 반면 한국에서는 '사치품'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기본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물가에 1.5배 정도의 가격을 붙이면 너무 부담스러운 가격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이제 학부생, 대학원생 친구들도 환경을 많이 생각하고 하나를 구매해야 할 때도 플라스틱 프리 제품, 유기농 제품을 선호한다 (쇼핑도 잘 안 하는 친구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돈 없는 학생들이 그런 소비활동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있을까?
나이가 들면서 부모님과 독립해 사는 생활의 중요성을 더 많이 느낀다. 감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독립해 가야 부모님도 나도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독립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더 많아지는 것 같다. 내 친구들만 하더라도 서울과 경기도에 직장이 있지만 날로 오르는 집값에 독립을 매년 늦추고 있다. 독립을 하더라도 안정적이고 여유롭게 지낼 수 있으려면 물가가 중요하다. 독일 사람들도 생각보다 월급을 많이 받지 않는다. 물론 직종과 연차마다 다르겠지만 세금이 40%인 나라에서 싱글에 보통 직장인이라면 세금 떼고 받는 돈은 300만 원이 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대 후반-30대 초반의 경우). 그런데도 대부분의 성인이(성인이라 함은 대학생도 포함해서) 부모님과 독립해 스스로의 삶을 영위하고 살 수 있는 근거는 안정적인 물가도 한몫을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