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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kim Nov 20. 2021

신부 노릇, 아내 노릇

80, 90년대에는 신부수업이 유행이었다. 상류층을 중심으로 시작했지만 이후에는 중산층의 예비 신부들까지도 결혼 전 여러 형태로 준비된 신부수업에 참여했다. 6-70년대부터 강화되어온 여성의 젠더 역할, 즉 가정 내에서 남편을 잘 보필할 수 있는 현모양처 메시지가 상업적 교육형태와 맞물려 꽃 피운 결과였다. 그 무렵 여성들의 사회진출, 경제활동 기회, 여자 대학생의 숫자도 늘어나고 있었지만 '취집' 또한 흔한 일이었다. 90년대생인 나에게도 신부수업이라는 단어는 생소한 어휘가 아니었고 "결혼 전 신부수업은 필수"라는 식의 대화는 TV에서도, 현실세계에서도 흔한 말이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5040500209207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04-05&officeId=00020&pageNo=7&printNo=19540&publishType=00020  

1985년 동아일보 기사


신부수업에서는 가장 기초적인 밥 짓기부터 시작해서 요리, 예절, 결혼관 등을 가르쳤다. 결혼관 교육 같은 건 여아 낙태를 종용하고 눈감아온 당시 8-90년대 남성들과 그 시부모들에게 더 시급해 보였지만 성평등하고 제대로 된 결혼관을 가르쳤을 리는 만무하다. 어쨌든 경제력과 몸뚱이만 준비한 신랑과는 다르게 신부는 결혼 전부터 남편을 섬길 만반의 준비를 하고 결혼 준비에 임한다.


남자건 여자건 결혼 전에 집에서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엄마가 해준 밥만 얻어먹었다면 참 곤란하다. 그건 그 집안에서의 여성(며느리, 아내) 의 위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성인이 되었지만 전혀 독립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자식들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요즘 시대에서 다시 위의 기사를 읽어본다면 '여자'와 '남자'를 바꾸어 읽어보아도 똑같이 적용되는 인용구가 있다. "남자(여자)들은 먹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여기 오신 여러분 중에 밥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도 있겠지만 자신 있게 만들 줄 아는 요리 몇 가지는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래야 사랑받아요" 나도 먹는걸 참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나를 위해 밥을 해주는 사람에게 감사와 사랑을 느낀다.


어쨌든 서론이 너-무 길어졌다. 40년 전 신부교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건 요즘 내가 결혼식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독일에서 지내고 있지만 남편(법적으로만)은 아직 한국에 있다. 한국인들과 여기 독일에 있는 독일인을 포함한 외국 친구들에게 남편이 곧 독일로 올 거라고 말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정말 다르다. 일단 독일에서 만난 우리나라를 제외한 해외 국적의 친구들은 모두 축하해준 다음 가끔 어떤 친구들은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고 끝. 남의 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 한국 지인들도 처음엔 축하를 해 주고, 그리고 또 아주 놀란다. 그리고 남편의 희생을 아주 칭찬한다. 그러고 나서 솔직한 몇 명의 사람들은 우리의 미래를 대신 걱정해준다.


지난번 아는 남자 지인 중 한 명은 심지어 내게 "유림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야심 있는 여자네"라고 했다. 그런 코멘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어이없음+불쾌의 표정을 마스크 속으로 숨겼는데 조금은 티가 났는지 '아니 나쁜 건 아니고.. 어쩌고저쩌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사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어떤 점에서 나를 '야심 있는' 여자로 평가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내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독일에 눌러앉은 점? 결국은 남자의 커리어를 희생시킨 점? 하고 싶은걸 해내려는 욕심?


사실 결혼을 하기 전까지 오랜 시간의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었고, 나와 남자 친구는 서로의 관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난 늘 내가 걷고 싶은 길을 명확히 이야기했고, 남자 친구에게 결혼이나 우리 관계를 위해 그 길을 희생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왔다. 그렇다고 남자 친구의 희생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모든 건 자신의 선택이고 자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추구하면 된다고 여겼다. 내가 남자 유학생이었고 내 예비신부가 한국에서의 직장을 그만두고 나를 따라온다라고 했다면 지금 같은 반응은 흔히 볼 수 없었겠지. 나나, 내 남자 친구의 직장보다 훨씬 돈도 많이 벌고 인기도 많은 직종에서 근무하던 언니들이 그렇게 남편 유학길을 따라가는 건 자주 보아왔다.


그리고 또 하나 있다.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느낀 건 결혼에는 관습적인 부분이 아주 많다는 거였다. 전통이라기보다는 관습적으로 굳어진 허영 같은 것들 말이다. 전통적인 결혼식 형태도 남아있지 않은 마당에 (전통 결혼식이라고 불리는 것들도 모두 마음대로 축약판이다),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결혼식을 디자인해서 부르고 싶은 사람들만 부르면 될 것을 모두 남들 하는 만큼은 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 같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상술과 정보교환이 혼재된 결혼정보들이 난무한데, 쭉 읽다 보면 '평균치'라는 게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패키지'로 꼭 해야 한다고 큰 소리를 내면서 '어떻게 해야 돈을 아낄 수 있는지' 혹은 '포인트로 결혼식 비용 아끼기' 등의 팁을 주려고 하는데 결국 드는 돈은 똑같이 많은 느낌이다.


한국과 동떨어진 나라에서 인터넷 서핑으로만 결혼을 준비하다 보니 내가 원하는 정보만 검색해볼  있어서 정보의 한계는 느끼지만, 그만큼 또래 압력(peer pressure) 덜하다. 다들 그렇듯 결혼 준비는 여자의 몫이 되어버리는  긴 하다. 청첩장 디자인부터 시작해서 데코, 메이크업, 한복 등등 내가  알아보고 있지만 (그래도 연락은 대부분 남자 친구가  수밖에 없어서 다행이다) 누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하니 나에게만 맞는 맞춤식의 결혼식을 준비한다는 느낌이다.


지난번엔 남자 친구와 드레스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드레스 대신에 하얀 슈트를 입고 싶다고 하니 남자 친구가 '제발 좀 다른 사람들 하는 것처럼, 튀지 말고 하자'라고 말해서 마음이 많이 상한 적이 있다. 나중에 남자 친구가 사과를 했고, 나도 왜 그때 그렇게 마음이 상했는지 곰곰이 생각한 후에 남자 친구에게 전달을 해 주었다. '치마 입는 게 더 예뻐', 혹은 '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고 싶어'도 아니고 '남들이 하니까 드레스'라는 식의 논리는 내게 전혀 먹히지 않는다. 오히려 내 자존심만 건들 뿐이다. 그놈의 '남들 하는 대로'가 한국에서 얼마나 나를 괴롭혀왔는데 또 이따위 말을 들을 수는 없다고..!!


독일의 내 친구는 결혼식에 입는 드레스 대신 짧은 중고 원피스를 샀다. 그리고 머리는 동네 미용실에서 했지만 메이크업은 직접 했다. 부모님 집 뒷마당에서 피로연을 열었고, 직접 준비한 텐트에서 파티를 열었다. 보통 결혼식 때 식사 테이블을 준비해주고 치워주는 사람들을 고용하기도 하지만, 친구의 결혼식에서는 손님들이 직접 자신이 먹은 접시를 치웠다. 그리고 그 결혼식은 지금까지 본 누구의 결혼식보다 밝았고 예뻤다.


한국에서의 결혼식이 신속+효율을 자랑하는 자본주의식 이벤트가 된 것이 정말 아쉽다. 나도 내가 초대한 사람들과 친밀감을 나누는 길고 긴 결혼식을 하고 싶지만 손님들은 그걸 원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남자 친구에게서 아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어떻게 해야 많은 사람들이 (특히 내가) 만족하고 즐길 수 있는 결혼식을 할 수 있을지 아직도 고민이다. 내가 신부이기 때문에 그날 제일 예뻐야 하고, 조신한 척해야 하고, 예쁘게 말하고 웃어야 하는, 그런 젠더 역할에 틀혀박힌 날은 되지 않을 거다. 최대한 편한 드레스를 입고 환경을 생각하고 사람들과 좋은 기억을 쌓을 수 있는 그런 날을 준비하도록 남자 친구를 더 많이 부려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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