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이디버드
교복을 입었던 그때 나는 나를 사랑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다른 사람들보다 어두운 피부색도, 큰 키도 왠지 촌스럽고 미웠다.
내 주위의 친구들은 왜 다들 별 볼 일 없어 보이던지.
거짓말로 포장해서라도 내가 멋진 사람처럼 보였으면, 하는 생각도 늘 하고는 했다.
레이디버드처럼.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영화 레이디버드의 주인공은 17살 소녀 크리스틴. 레이디버드는 크리스틴이 자신에게 지어준 이름이다. 어떤 기사에서는 성장 영화라고도 하던데, 사실 거의 모든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성장하지 않는가? 그래도 이 영화에서는 자신을 찾고, 성장하는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성장 영화라고 부를 수 있나 보다.
영화는 담백하게 우리의 열일곱 향수를 자극한다. 미국 소녀의 경험은 야자와 성적에 파묻힌 우리네 고등학교 시절과는 다르기도 하지만 같기도 하다. 복잡 미묘한 친구들과의 관계, 첫사랑, 대학, 가족. 모두 우리가 십 대에 거치고 지나온 기억일 수 있다. 레이디버드가 엄마에게 소리를 박박 지르고, 친구들에게 거짓말하는 모습조차도 밉지가 않다. 아마도 이렇게 엎어져봐야 자란다는 걸 알았기 때문인가 보다.
그래도 크리스틴이 제일 예뻤던 장면은 바로 크리스틴이 대니의 아픈 곳을 품어주었을 때다. 자신이 배신당했다는 사실만 주목했다면 크리스틴이 대니를 안아주지 못했을 거다. 그렇지만 크리스틴은 대니가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보았고 같이 아파해줄 수 있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고 품어주려면 마음의 그릇이 커져야 한다. 크리스틴의 마음은 분명 크고 있었다.
영화 말미에서 크리스틴은 자신의 고향과 부모가 준 크리스틴이란 이름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부모에게서 떠나 독립된 개체가 되면서 고향을 사랑하게 되었고, 자신을 인정하게 되는 모양은 우리 모두가 지나와야 할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영화 레이디버드를 꼭 보고 싶었던 이유는 감독이 그레타 거윅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프란시스 하'에서 주연을 맡은 그레타 거윅. 거윅은 분명 영화에서 여성만이 낼 수 있는 어린 여성의 목소리를 섬세하게 담았다. <프란시스 하>, <미스트리스 아메리카> 등을 연출한 노아 바움벡의 연인으로 그의 뮤즈라는 이름표가 붙었던 그레타 거윅은 이번 영화 <레이디 버드>를 통해 많은 상을 받았고 단순히 누군가의 뮤즈가 아닌 뛰어난 연출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자신의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뮤즈로만 불리는 것은 분명 슬픈 일이고, 이번 영화를 통해 거윅이 자신을 입증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 기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