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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kim Feb 10. 2020

달라진 건 없지만, 마음이 달라졌다.

조용하고 천천히 흘러가는 독일에서의 박사과정.

작년 2월 말에 독일에 와서 무작정 학교에 등록부터 하고 박사과정을 시작했는데, 어느덧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지난 한 학기는 한국에서 지냈지만 시간은 재빠르게 지났다. 다시 독일에 돌아와 책상 앞에 오랜만에 앉으니 오랜만에 갖는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간이라 그런지 집중이 잘 되어서 새삼 놀라고 있는 중이다.


독일에 오기 전에는 아직 다 나은 게 아닌데 꼭 독일에 가야겠냐, (4월에 검사를 한국에서 받아야 하기에) 독일에 그렇게 짧게 있을 건데 굳이 가는 이유가 뭐냐, 더 있다 가라 등등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나 또한 왜 굳이 1월에 독일에 가려는 마음이 드는 걸까 의문이 들었지만, 그래도 '12월 결과에 따라 1월에 가기로 했으니까'라는 마음으로 독일행을 번복하지 않았다. 막상 독일에 와서 하고자 했던 계획은 이사를 하고, 짐을 정리하고, 여행을 다니고 등등의 대부분 공부와 거리가 먼 내용들이었다. 석사 때 나를 아껴주셨던 교수님도 이번 독일에 있는 시간 동안 절대 무리 말고 놀다 온다고 생각하라고 했고, 아빠도 그렇게 얘기했기 때문에 정말 마음 편히 '놀다 올' 예정이었다. 마음 한편에 '그래도 뭔가 해야 할 텐데'라는 마음은 있었지만.


다행히 부다페스트에서 진행되는 컨퍼런스에 초대되었고, 이번에 독일에 있는 시간 동안은 '독일에서 뭘 하면 되지?'라는 생각 대신 컨퍼런스 발표 준비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도교수님을 만났다. 오랜만에 그동안 해왔던 (빈약한) 프로젝트 내용과 앞으로의 계획을 내밀었다. 교수님은 6월에 있을 워크샵에 나를 추천해 주셨고, 교수님과의 한 시간 면담 끝에 몇 주 사이에 나의 한 학기 일정이 가득 차게 되었다.


작년 이맘때쯤 독일에 처음 도착했을 때 독일 박사과정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고 나 스스로도 너무 비전문적인 느낌이었다. 스스로 위축되어서 안간힘을 쓰며 자존감을 끌어올리려 노력했던 시간이었다. 그에 비해 이제는 조금 더 여유로워졌다. 일감은 천천히 나를 찾아온다. 조급할 필요가 없다. 할 일이 없다면 쉬면 된다. 언젠가 바빠질 시간이 올 테니 잘 쉬어두자.


한 번에 이루어지는 일도 없고, 한 번에 무언가를 쌓을 수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나 보다. 지난 일 년은 천천히,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해야 어느 순간에 이루어 놓은 것들이 빛을 발함을 몸소 느꼈던 시간이었다. 박사과정을 하면서 행운, 행복, 즐거움 등은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터져 나왔고 그러려면 그만큼 내가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아마 이번 부다페스트 컨퍼런스 발표도 작년 12월 병을 핑계로 아무 공부나 준비도 해두지 않았다면 지금쯤 참석하지 못한다고 말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나의 준비 속도는 엄청나게 느리고 더디다.


카카오 가루만 넣은 핫초코, 블루베리/ 정체불명의 루꼴라 볶음밥, 된장찌개.

새로 이사한 집은 원래 강아지를 키우기 위해 구한 집이다. 강아지는 아직 함께이지 못하지만 혼자서도 너무 웰-빙의 생활을 하고 있다. WG형태의 집이지만 사실상 각자 주방 딸린 방(거실이랄까)과 침실 하나씩이 있어서 나와 룸메이트는 화장실만 함께 쓰고 있다. 이런 형태의 집은 독일에서도 본 적이 없고, 2인 WG로는 최고인 것 같다. 어쨌든 아주 사적인 공간을 가진 지금, 집에서 세끼 밥을 요리해 먹고, 건강한 간식을 먹으며 홈트레이닝 영상으로 필라테스도 종종 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었다.


사랑 - 모든 것이 가능하다!/ 쉬운(!) 지속가능한 삶


모든 것이 가능할 거라는 주문 같은 글귀를 책상 앞에 붙여두고 편안한 마음으로 공부를 하니 독일의 겨울도 따뜻하다. 작년에는 꼭 장학금을 받아야 한다, 학업 결과물이 나와야 한다 등등의 압박이 머릿속을 부유했다. 지금은 상황이 크게 변한 것도 아닌데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상황 만으로도 감사해서 별 걱정이 없다. 그래서인지 주위를 조금 더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독일어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내가 좋아하는 분야인 환경보호 서적도 샀다. 작년이라면 한 푼이라도 아끼느라 전공서적이 아니라면 사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벌써 두 권의 비 전공서적을 사두고 읽고 있다. 그냥 쉴 틈을 주고 있다.




+독일에서 인문학, 특히 아시아 혹은 한국학 전공 박사를 하고자 하시는 분들께 드리는 Tipp (unstructured programme 위주)


1. 박사과정은 대학교에 등록하지 않은 채로도 진행 가능하다. 대학교에 등록하는 것은 학생 비자를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한국에서 일하면서 박사 논문을 쓰고 마지막 학기에만 등록하는 것도 학교에 따라 가능하다는 의미다. 해당 학교 & 지도교수와 상의하시길.  

2. 사회과학과는 다르게 논문 출판의 수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난 아직까지 그걸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에 교수님과 상담하면서 ("너 그거 몰랐니?") 사회과학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냥 졸업 논문 잘 쓰고, 컨퍼런스, 워크샵 참석 꾸준히 하면서 제때 졸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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