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첫째 주. 딱지대회를 치른 어느 날
오늘은 딱지대회가 있는 날입니다. 1학기와 달리 격월로 공기대회와 딱지대회를 번갈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공기놀이와 딱지치기는 점심시간 운동장을 사용할 수 없는 환경이 안타까워 실내놀이로 1학기부터 장려해 왔습니다. 그런데 2학기에 들어서니 삼삼오오 모여 쉬는 시간마다 기록을 올리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점차 사라집니다. 딱지대회 당일에도 딱지 연습을 하는 아이들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쉬는 시간, 보드게임 삼매경에 빠진 여자 아이들 틈에 살짝 끼어들어봅니다. "얘들아, 오늘 딱지대회하는 날인데 왜 연습 안 해?" 아이들을 손사래를 치며 하고 싶은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냅니다.
-선생님, 공기는 그래도 해볼 만한데, 딱지는 진짜 운이 좋아야 해요.
-맞아요! 팔 힘이 세야 해요.
-힘이 센 친구가 엄청 유리해요.
-그래서 남자애들이 더 잘하는 것 같아요.
지난번 딱지대회에서 우승한 여자아이도 본인은 운이 좋았을 뿐이라며 다른 친구들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물론 힘이 좋은 아이가 유리하긴 하지만, 딱지도 기술인데 아이들은 동의하지 못하나 봅니다. 결국 보드게임을 하는 와중에도 힘이 센 남자애들은 왼손으로 해야 한다며 불만섞인 말을 이어갑니다.
딱지대회가 시작됩니다. 토너먼트로 1차전부터 5차전까지 경기가 쭉 이어집니다. 아쉬움과 탄식이 경기장 여기저기서 터져 나옵니다. 결국 1학기 딱지왕 자리를 차지한 친구가 또다시 우승자의 자리를 거머쥐었습니다. 쉬는 시간 아이들의 예상과 달리 여자아이, 은서입니다.
교실 칠판 한 귀퉁이 '딱지왕' 자리는 은서의 이름이 차지합니다. 이대로 끝나는 것이 아쉬워집니다. 딱지의 부흥을 기대하며 오늘은 선생님이 한번 나서 봅니다.
-은서야, 쉬는 시간에 나와봐. 선생님이랑 한 번 해보자!
은서의 눈이 동그래집니다. 지금껏 한 번도 아이들과 직접 겨뤄본 적은 없습니다. 선생님이랑 한번 해보면 아이들이 좀 더 딱지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싶어 아이에게 먼저 경기를 권해봅니다. 아이는 즐거움과 당혹스러움 그 어딘가의 표정을 띠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아 단판 승부로 규칙을 정합니다. 딱지 1개를 가지고 먼저 넘기는 쪽이 승리합니다.
선생님도 팔을 걷어 올리고 양반다리로 교실 바닥에 아이와 나란히 자리를 잡습니다. 정정당당하게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합니다. 선생님이 먼저 바닥에 딱지를 내려둡니다. 은서가 딱지를 내려칩니다.
딱
딱지가 들썩였지만 뒤집어지지 않고 잘 버텨줍니다. 선생님도 팔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립니다. 세차게 딱지를 내려치지만 넘어가지 않습니다. 딱지가 얇아 쉬 넘어가지 않습니다.
몇 번을 그렇게 주고받은 어느 순간, 선생님 딱지가 힘없이 빙그르르 뒤집어집니다. 아, 졌다. 은서에게 패배를 인정하고 빌린 딱지를 돌려줍니다. 우승자는 미소를 머금고 다른 아이들과 경기를 하기 위해 유유히 자리를 떠납니다.
겨우 열세 살짜리한테 지다니... 선생님 속에 숨어있던 어린아이의 승부욕이 조심스레 끓어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때 은서와 결승에서 붙어 아쉽게 2등을 한 태린이가 다가옵니다.
-선생님, 저랑도 한 판 해요.
좋아, 지금 나한테 결투를 신청했다 이거지? 태린이는 키도 크고 덩치도 좋습니다. 우리 반 아이들 중 가장 운동을 잘 하는 친구 중 하나입니다. 쉬는 시간 여자 아이들의 불만 어린 투덜거림이 귓가에 메아리치지만 덤벼오는 자는 막지 않습니다.
-좋아, 단판승부!
본격적으로 해봐야겠습니다. 너한테까지 선생님이 지면 자존심 상하지. 선생님은 팔을 걷어붙이고 태린이 앞에 자리를 잡아봅니다.
가위바위보!
선생님이 먼저 공격합니다. 딱! 쉽사리 넘어가지 않습니다. 몇 번을 주고받으니 선생님 이마에도 땀이 맺히기 시작합니다. 일단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요. 잠시 경기를 멈추고 선생님은 걸리적거리는 긴 머리를 높게 올려 묶습니다. 있는 힘껏 내리칩니다.
딱!
넘어갔다! 태린이 딱지가 멋지게 호를 그리며 뒤집어집니다.
-앗싸! 내가 이겼다! 태린아 내가 너 이겼다!
선생님은 기쁨에 취해 환호성을 내지릅니다. 선생님에게 빌려준 딱지가 공격용 딱지였다며 아쉬워하는 아이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선생님은 "이겼다!"를 연발하며 신나게 외쳐댑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신이 났나 봅니다. 딱지대회의 부흥을 위해 아이들과 한 경기였는데, 승리의 기쁨에 도취해 제가 잠시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흥분한 선생님의 모습에 내 주위 아이들이 배를 잡고 웃고 있습니다. 내가 너무 좋아했나 싶어 미안한 마음에 태린이를 찾으니 아이는 시무룩한 기운만 남긴 채 저 멀리 사라졌습니다.
기쁨을 감출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항상 이야기해왔습니다. 특히 경기를 할 경우 이긴 사람은 진 사람을 위해 감정을 감추고 위로도 건넬 수 있어야 한다고. 정신이 돌아온 선생님은 당혹스럽습니다. 내 주위 아이들은 이런 선생님의 모습이 너무 신기한가 봅니다.
-선생님, 우리 선생님 어디 갔어요? 혹시 정윤진 선생님이세요?
줄곧 선생님으로 지켜왔던 가면이 벗겨졌습니다. 귀신같이 선생님의 약점을 알아챈 아이들이 선생님 이름의 한 글자만 바꿔 선생님을 놀려댑니다.
-선생님, 왜 이렇게 좋아하세요? 이긴 게 그렇게 좋으세요?
-선생님, 선생님 이런 모습 처음 봐요.
-전 선생님이 항상 차분한 사람인지 알았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6학년 아이의 딱지를 한 장 넘겼을 뿐인데, 이게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요? 이 상황이 황당하다 못해 너무 웃겨 선생님도 배를 잡고 함께 웃어 봅니다. 내 주위를 둘러싼 아이들도 3월부터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선생님의 모습에 어이가 없던지 모두 함께 깔깔대며 큰 소리로 웃어댑니다.
문득 기억이 터져 나옵니다. 2008년, 처음 6학년 아이들을 만났던 철없던 그 순간의 선생님이 나와버렸습니다. 감정을 감추는데 능숙한 21년 차 선생님이 초보선생님이 되어버렸습니다. 아이들과 배를 잡고 배꼽이 떨어져 나가게 웃을 일이 참 많았던 그 시절로 돌아가버렸습니다. 딱지놀이를 권장하기 위해 아이들과 한 번 해 본 것뿐이었는데... 결국 아이들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정말 한 톨의 거짓 없이 이렇게 신나게 웃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웃음이 2008년, 당시 6학년 아이들과 함께 한 행복의 순간을 수면 위로 끄집어 올립니다. 그 해, 저에게 비수를 꽂았던 말에 상처받아 다른 아이들이 준 따스한 순간을 모두 놓아버렸습니다. 사실 2008년은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받은 해였습니다. 둑이 무너져 내리듯 그 당시 내가 받은 따스한 순간의 기억이 오늘의 웃음을 시작으로 수면 위로 둥실 떠오릅니다.
2008년, 정신 나간 학부모 하나가 저에게 꽂은 칼날을 부여 쥐고 끌어안고 있는 건 저 자신이었습니다. 이제는 그 칼을 뽑아내야겠습니다. 제 자신을 위해, 그리고 미래에 내가 만날 다른 아이들을 위해. 단단히 부여잡고 있던 과거의 칼날을 놓아주어야 할 순간이 다가온 것 같습니다. 이제는 따스한 추억으로, 행복했던 기억으로 저의 남은 시간을 채워야겠습니다. 더 단단하게 나아갈 수 있게 다시 한번 내 마음을 다잡아보아야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너무 좋아했을까요? 태린이 얼굴이 엄청 시무룩해졌었는데. 과거의 기억을 되돌려준 내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이제야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내일 다시 만나면 정식으로 사과해야겠습니다.
미안해, 태린아. 그리고 2008년의 내 시간을 돌려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