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마지막 주, 공기대회 거대한 지각변동을 맞이하며
계절의 변화가 가져다준 겨울바람처럼 1년간 지속된 공기대회도 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12월 마지막 주에는 학기 초 약속대로 한 달에 한 번씩 진행된 공기대회와 딱지대회의 최종전이 치러질 예정입니다. 20년째 이어오고 있는 저희 반만의 학급행사이지요.
한 달에 한 번씩 토너먼트 형식으로 공기대회나 딱지대회를 치르고, 1등을 거머쥔 아이에게는 노력의 대가로 칠판 한 귀퉁이에 이름을 적어둡니다. 영광을 좀 더 빛내주기 위해 아이 이름 'ㅇ'에 얼굴을 그리기도 하고, 이름 주변에 하트나 반짝이로 장식해 두기도 합니다.
이 중 칠판 한 귀퉁이 '공기왕' 자리를 8개월째 굳건히 지키고 있는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진영입니다. 4월 대회에서 단 한 번 자리를 빼앗긴 후, 5월부터 현재까지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칠판에 올리고 있습니다. 이 친구와 토너먼트 짝꿍이 되면 '진영'이라는 이름의 기세에 눌려 잘하던 아이조차 손을 바르르 떨며 무너져 내리기 일쑤입니다. 소위 기세라는 걸 몸소 보여주고 있지요.
아이들은 3등까지 자신의 이름을 넣어보려 노력하지만, 감히 누구도 1등은 섣불리 도전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자조 섞인 말로 한탄을 내뱉는 지경입니다.
-선생님, 진영이 이름이 아예 칠판에서 안 지워지는 게 아닐까요?
-선생님, 진영이는 누구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아요.
-선생님, 저는 그냥 3등 안에 드는 걸 목표로 하고 있어요.
경기 시작 전, 토너먼트 대진을 짜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은 두 손을 꼭 쥐고 제비 뽑기 막대를 뽑는 선생님 손을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1차전에 진영이와 붙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한 명씩 이름이 불리고 대진표가 하나둘 채워집니다. 진영이 차례입니다. 진영이 대진 상대로 본인 이름이 불리지 않길 바라며 아이들은 귀를 쫑긋 세웁니다.
-박선영
아! 이름이 불리자마자 탄식과 안도의 한숨이 동시에 여기저기서 터져 나옵니다. 공교롭게도 선영이는 여자 아이들 중 가장 공기를 잘하는 친구입니다. 지난 대회에서 진영이와 붙어 아쉽게 2등을 차지한 친구라 선영이 얼굴은 아쉬움으로 가득합니다. 벌써 본인은 1차전에서 떨어진다는 걸 확신한 듯 얕게 한숨을 내쉬고 있습니다.
이 대회의 목적은 1등이 아니라 너희들이 함께 경기를 해 보는 것에 있다고. 꼭 1등이 아니라도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거라고 아이를 달래 보지만 선영이의 축 처진 어깨는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선영이의 아쉬움을 뒤로 하로 곧장 1차전이 시작됩니다. 1차전은 3분입니다. 3분 동안 더 많은 점수를 내는 친구가 승리합니다.
땡!
3분이 끝이 납니다. 그 순간 선영이와 진영이 주위가 술렁이며 소란이 일기 시작합니다. 무슨 일일까요? 주변을 둘러싼 아이들은 대형 사고라도 터진 냥 입을 벙긋거리고 손으로 허공에 뭔가를 그리며 선생님께 다급하게 신호를 보냅니다. 입꼬리가 귀밑까지 올라간 선영이와 멍하니 넋이 나간 진영이, 토끼 같은 눈으로 선생님에게 뭔가를 전하는 주변 아이들을 보니 대이변이 일어났나 봅니다.
차례대로 결과를 들어봅니다. 이긴 사람이 본인의 이름과 점수를 크게 이야기합니다. 진영이와 선영이 차례입니다.
박선영, 104점으로 이겼습니다.
우와! 주변에서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8개월 만에 진영이의 이름이 칠판에서 지워진다는 사실에 자신의 결과와 상관없이 교실이 크게 술렁입니다. 그때 진영이가 속상한 마음을 감추고 조용히 혼잣말로 읊조립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가위, 바위, 보에서 졌더니 선영이가 3분 동안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끝까지 계속했어요. 저한테는 아예 기회도 없었어요.
진영이의 속상한 마음도 모른 채 아이들은 안타까움과 놀라움이 섞인 웃음이 터트립니다.
얼마 전 진영이의 기세에 주눅 들었던 다른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했던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일에는 길이 있다고. 절대 할 수 없어 보이는 것도 내가 준비하고 있으면 분명 그 기회가 찾아온다고.
공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압도적으로 잘하면 주어진 시간 동안 상대에게 기회를 주기 않을 만큼 내 실력을 기르라고. 만약 가위, 바위, 보로 시작을 잡게 되면 내 실력으로 정정당당하게 상대를 누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은 이렇게 했지만 설마 3분간 실수가 한 번도 없으리라 생각하진 못했는데, 결국 선생님이 말한 방법을 몸소 실천한 아이가 생겼습니다. 진영이의 마음은 속상하겠지만, 정해진 규칙 내에 상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결국 최종 승자는 진영이와 1차전에서 맞붙었던 선영입니다. 8개월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진영이의 이름을 지우고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칠판에 올렸습니다. 선영이 얼굴에는 만족감으로 가득 찹니다. 새롭게 적힌 이름을 본 아이들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12월 최종전을 기다려봅니다. 2등 자리에 오른 아이가 말을 이어갑니다.
-선생님, 그런데 공기대회는 대진운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사실이야. 공기대회처럼 너희들이 살아가는데 운이라는 것도 사실 정말 중요하단다. 그런데 그 운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준비된 사람이야. 오늘 선영이가 가위, 바위, 보를 이겨 먼저 할 수 있었던 건 사실 운이지. 하지만 선영이는 지난 10개월 동안 공기를 열심히 연습했기를 그 기회를 잡고 1등을 할 수 있었던 거야.
-대신 그 반대도 마찬가지란다. 때론 내가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도 그 기회가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때가 있어. 이때 속상하다고 포기하고 놓아버리면 다음번 나에게 찾아올 운도 결국 나를 빗겨 나가게 된단다. 진영이도 12월 최종 경기에서 도전해 봐! 넌 할 수 있어.
아이들은 선생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선영이와 진영이가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40년 넘게 살아온 선생님은 이제 이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인생에는 분명히 '운'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요. 하지만 그 운은 준비된 자만이 잡을 수 있습니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주어진 상황에 투덜거리는 자는 운이 코 앞에 떨어져도 절대 찾아낼 수 없습니다. 행운과 노력은 결코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함께 해온 1년의 공기놀이를 통해 우리 아이들이 행운과 노력의 상관관계를 알고, 포기하지 않고 도전해 나가는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