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선생님 기다렸어요(2)

12월 초입, 겨울바람이 심술을 부린 어느 날

by 콩나물시루 선생님

12월에 접어들었습니다. 3월에는 절대 오지 않을 것 같던 날이 다가왔습니다. 만남의 순간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헤어짐의 순간이 손에 닿을 만큼 거리를 좁혀왔습니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운동장에서 체육 수업을 진행합니다. 운동장 수업은 체육관 수업과 달리 제약이 많습니다. 때론 비기 와서, 때론 눈이 와서, 때론 미세먼지가 심해서, 때론 운동장 흙 상태가 좋지 않아서. 돌이켜보면 실상 올 한 해 운동장에서 수업을 한 것보다 교실에서 체육 수업을 한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정말 오래간만에 찾아온 운동장 수업입니다. 교실 체육이겠지라고 생각하며 별 기대도 없던 아이들은 운동장 수업이라는 말에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눈을 반짝입니다.


체육은 2교시라 겨울바람에 운동장이 아직도 꽁꽁 얼어있습니다. 겨울 햇살이 운동장을 녹이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입니다. 행여 감기라도 걸릴까 선생님은 "외투 입어라", "장갑도 끼세요", "목도리도 하자"라고 아이들을 꽁꽁 싸매봅니다. 운동장 수업에 들뜬 아이들은 선생님 마음도 모른 채 운동장 생각뿐입니다.


-선생님, 저 하나도 안 춥단 말이에요.


아침부터 콜록거리던 모습을 봤는데, 체육 수업 앞에선 감기도 자취를 감추나 봅니다. 선생님 잔소리에 입을 삐죽이 내민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 옷을 껴 입힙니다. 가지고 온 옷을 다 입히고 장갑에 목도리까지 무장한 채 복도에 줄을 세웁니다. 한결 뚱뚱해진 몸으로 뒤뚱거리지만 아이들은 어느 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실을 떠납니다. 선생님도 아이들을 따라 재미있게 수업하라고 손 인사를 하며 운동장에서 체육 선생님께 아이들을 인계합니다.


아이들을 보내고 온 교실은 아직 온기가 남아있습니다. 교실 창문으로 아이들이 수업하는 모습을 바라던 중 옆 반 선생님이 교실 문을 두드립니다.


-선생님, 저 교무실 다녀오는 동안 저희 반 좀 봐주세요.


6학년에 급한 일이 생겨 옆반 담임 선생님이 수업 중 자리를 비우게 되었습니다. 옆 반으로 가 담임 선생님의 빈자리를 채워줍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렸지만, 옆 반 선생님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일이 길어지나 봅니다. 저희 반 아이들은 체육 수업이 마치면 알아서 올라오겠지요. 쉬는 시간까지 계속 옆 반 교실을 지켜줍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옆 반 선생님이 돌아왔습니다.옆 반 선생님께 아이들을 맡기고 다시 저희 반 교실로 돌아갑니다. 시계를 보니 쉬는 시간이 7분이 흘렀습니다.


어? 그런데 이건 뭘까요? 복도에도, 교실에도 저희 반 아이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체육 선생님은 뒤이어 다음 반 수업이 있기 때문에 절대 수업을 늦게 끝내시는 법이 없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허겁지겁 운동장으로 뛰어 내려갑니다.


아, 이건 무슨 일일까요?


차라리 아이들이 자유를 만끽하며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놀고 있었으면 이것보다 더 놀라지 않았을 텐데요. 아이들은 회장을 필두로 남자 한 줄, 여자 한 줄 정말 조용히 겨울바람을 한 몸에 맞으며 운동장 한 구석에 서있었습니다. 왜? 도대체 왜?


쉬는 시간이 7분이 지났다는 건, 수업이 끝난 지 최소 5분은 지났다는 뜻일 텐데요. 오들오들 떨면서 저를 기다린 걸까요? 헐레벌떡 뛰어와 가쁜 숨을 감추며 놀란 토끼눈으로 아이들에게 물어봅니다.


-얘들아, 왜 안 올라온 거야? 추운데 수업 마치면 곧장 올라왔어야지!


아이들은 선생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구동성으로 목소리를 높입니다.


선생님 기다렸어요


예상치 못한 아이들 답변에 선생님은 귀를 의심합니다. 길을 잃을까 무서운 것도 아니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 추위에 저를 기다린 걸까요? 운동장 수업 마치고 선생님이 없으면 당연히 교실로 돌아오는 게 아닐까요? 그 누구 하나, 심지어 회장, 부회장 아이조차 한 치의 의심 없이 당연히 선생님이 돌아와 같이 갈 거라 생각했나 봅니다.



-선생님이랑 같이 가야 하잖아요.


-선생님 저희 데리러 오는 거 깜빡하신 거죠?


-선생님은 체육 시간이면 항상 일찍 오셔서 저희 체육 하는 거 보셨잖아요.


-저희가 선생님 말 진짜 잘 듣잖아요.



아이들은 "선생님 없으면 그냥 올라왔어야"라는 선생님의 원망 섞인 다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을 기다리는 게 당연하다는 듯 오들오들 떨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칩니다. 제가 졌습니다. 겨울바람을 이기려 두 손을 연신 비벼대면서도 배시시 웃는 아이들 모습에 두 손, 두 발을 들었습니다.


-그래, 미안. 내가 잘못한 거였네. 내가 너희들 먼저 챙겼어야 했는데...


아직 덩치만 큰 아이들이 맞았습니다. 매번 동네를 벗어날 때면 부모님 손 꼭 붙잡고 안전하게 돌아다니라고 말은 하지만, 설마 교실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운동장에서조차 선생님을 기다릴지 상상도 못 했습니다.


1학기 급식실에서 마지막까지 밥을 먹는 선생님에게 농담조로 건넨 "선생님 기다렸어요"라는 말이 참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함께한 시간 때문이라는 건 알겠지만, 추위에 오들거리며 26명이 한목소리로 건넨 "선생님 기다렸어요"라는 말이 따뜻하지만 가슴 한켠을 서늘하게 하는 건 왜 일까요?


제가 올 한 해 잘 가르친 게 맞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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