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지는 못하는 사람이지만 자주 마주친다거나 왠지 관심이 가는 사람이 있듯이 음악도 그렇다. 클래식 FM에서 음악을 듣다가 알지 못하더라도 귀에 너무 괜찮게 들리는 곡이 있으면 얼른 메모를 했다가 다시 찾아 듣곤 한다. 그렇게 찾아듣는 음악들의 작곡가가 일치할 때가 많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재작년엔 그렇게 1년 내내 베토벤을 찾아들었고 작년엔 브람스였다.
올해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되는 음악가는 안토니오 비발디이다. 작년에 어떤 광고에서 너무나 매력적인 음악을 듣고는 찾아 들었던 음악이 사계 중 여름 3악장이었다. 그 후로 몇 곡의 비발디 곡을 들으면 전율을 느낄 정도로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번엔 비발디라는 음악가에 대해 더 알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발디는 바흐나 헨델과 같은 바로크 시대 음악가이다. 비슷한 듯 다른 그들의 음악엔 특징이 있는데 비발디가 가장 섬세하고 화려하다. 바흐가 우직하고 남성적이라면 헨델은 바흐보다는 여성적인 느낌을 준다. 헨델이 고상한 어머니 같은 인상이라면 비발디는 우아하면서도 화려하게 치장한 젊은 여성의 이미지랄까.
안토니오 비발디 (1678~1741)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생이다. 15살 때부터 성직자가 되기 위해 교육을 10년간 받았지만 집에서 음악가였던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웠다. 사제 서품을 받은 이후엔 건강이 나빠져서 미사집전이 힘들었다. '미사를 집전하지 않는 신부'혹은 '빨강머리 사제'라는 별명으로 불리곤 했다. 사제의 자리에서 내려와 피에타 음악원의 바이올린 교사로 시작해 이후 음악원의 최고 책임자가 된다. 한시대를 풍미한 작곡가였지만 빈민촌에서 연명하다 객사한다.
그는 독주협주곡 양식을 정착시켰는데 신선한 선율, 활기찬 리듬, 독주와 오케스트라 음색의 능숙한 처리, 형식의 명료함이 돋보이고 바이올린 협주곡를 다수 작곡했다. 바로크시대엔 기악곡에 제목이나 해설을 붙이는 일이 드물었지만 제목이 붙은 음악이 많다. (예: 사계, 바다의 폭풍, 의심, 불안. 안식. 애인)
제목이나 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묘사적인 기법을 사용했다. 추상적인 음악에 구체성을 부여하려는 시도였는데 당시로서는 상당히 낯선 개념이었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어라'
글쓰기를 배울 때 가장 어려운 건 바로 '묘사'였고 지금도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글쓰기는 어렵다. 은유 작가는 <쓰기의 말들>에서 ''어제 카페에서 하루 종일 만화책을 읽었다'가 아니라 '창이 넓은 2층 카페에서 만화<레드 로자>를 읽었다가 좋다.'라고 말했다. 이런 표현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정작 내 글에 적용하는 건 왜 그리도 힘든지...ㅜ
비발디의 음악이 섬세하고 다채롭게 들렸던 건, 그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치밀할 정도로 상세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란 걸 알고는 무릎을 탁 쳤다. 내 글이 풍성해지기 위해선 묘사를 잘 해야 하는구나. 이미 글쓰기에서 묘사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음악을 통한 묘사에 대해 접하게 되니 더 직접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고 해야할까.
지난 해 가을, 브런치 북 응모를 끝으로 음악이야기를 올리지 못 하고 있었다. 마당엔 수선화가 피고 벚꽃망울이 붉어지기 시작하는 계절이 되어서야 난 다시 음악에세이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시작이 비발디라 다행이다. 그가 음악으로써 표현했던 것들, 하고 싶던 말들을 음악을 통해 들으면서 나도 '나의 쓰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