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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앵 Jun 25. 2023

한마디씩, 천천히 천천히

나만의 피아노 연습법 3


여름의 싱그러움이 짙어지는 6월의 주말 오후, 그냥 집에 있기 아까워 우리 집 개님 루피와 함께 오름에 올랐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함께 하는 외출의 횟수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나가자고 하면 만사 제쳐두고 따라나서는 건 루피뿐이라는 걸 깨달은 후로 루피에 대한 우리 부부의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루피야! 너밖에 없구나. 앞으로 우리랑 많이 놀아줘~.


노꼬메 오름 주차장에 도착하니 루피는 자기만 두고 내릴까 봐 벌써부터 불안한 몸짓을 한다. 루피와 차에서 내려 하네스 줄을 하고 오름을 오르기 시작했다. 수줍은 듯 피어있는 산수국들이 길을 따라 줄지어 있고 가끔씩 군데군데 소박하게 익어가는 산딸기도 보인다.



나뭇가지가 하늘까지 덮어 터널을 이루는 완만한 지점을 지나 '마의 코스'인 계단이 시작되는 지점. 루피도 계단 앞에서 멈칫하더니 끝없을 것 같은 계단을 한 번 쓱 보고는 가기 싫은지 걸음을 멈춰버린다. 녀석을 살살 달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 길지 않은 계단이란 걸 알면서도 가파른 경사가 금세 지치게 만드는 구간이다. 얼마 되지 않아 헉헉대기 시작했고 초여름의 후텁지근함이 더해져 언제 꼭대기까지 오를지 막막했다.


그래, 위는 쳐다보지 말고 그저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오르기만 하자!


어느 순간, '정상에 빨리 올라야겠다'는 생각, '얼마나 남았을까'라는 생각은 접고 루피와 함께 하는 발걸음 하나하나에만 집중을 했다. 하나둘하나둘, 꼭대기를 바라보며 가기 싫어하던 루피도 나랑 발을 맞춰 경쾌하게 계단을 오른다.


그러다 보니 계단 하나하나를 오르는 것이 악보를 보면서 한마디 한마디 피아노를 치는 것과 왠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치고 있는 템페스트는 곡 길이가 내겐 길어도 너무 길다. 14페이지나 되는 곡이니 악보를 읽는 데만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더듬더듬 칠 수 있을 때까지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어느 정도 익숙하게 치려면 몇 달이고 연습을 해야 한다.


베토벤 덕후로서 베토벤의 곡은 쳐도 쳐도 지루하지 않지만, 지금의 실력으로는 곡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이 곡을 어떻게 끝까지 지치지 않고 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오히려 금방 지쳐버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연습방법이 아주 잘게 쪼개서 그 부분만 치는 것이었다. (1시간 단위의 연습은 부답스럽지만, 10분씩 쪼개서 연습하는 걸 반복하면 훨씬 덜 지루한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전에는 연습을 시작하면 항상 처음부터 연주를 해왔었다. 예를 들어 14페이지의 곡을 칠 때, 7페이지까지 악보를 읽었다면 연습을 할 때 첫 페이지에서부터 7페이지까지 치는 것을 몇 번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틀린 부분은 자꾸 틀린다.


짧게는 4마디에서 길게는 악보 반장 정도를 정해서 그 부분만 집중적으로 연습하니 부분연습도 되고 시간도 절약되었다. 무엇보다 자꾸 반복해서 치는 첫 부분은 잘 치는데 뒤로 갈수록 완성도가 떨어지는 걸 방지할 수 있다. 시간이 없는 날은, 오늘은 '네 마디를 10분만 연습하자'는 생각으로 짧게 연습을 하고 다른 할 일을 한다.


그렇게 몇 마디를 연습하고 다음날은 또 짧게 몇 마디를 연습하고... 그걸 매일 반복하면 마치 퍼즐을 맞추듯 전체가 완성된다. 그렇게 연습을 하다 보니 길게만 느껴졌던 템페스트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게 조각을 맞추듯 연습을 한 후엔 전체적으로 느낌을 살려 치는 연습에 돌입해야 하고 그 과정도 멀고 험난 할 것이지만, 일단 처음부터 끝까지 악보를 보고 익숙해지는 데 잘게 쪼개서 하는 연습이 내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피아노 건반 같기도 하고 악보의 한마디 같기도 한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다 숨이 턱 막히는 구간을 지나고 나니 정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360도 풍광이 예술인 노꼬메 오름은 내가 가 본 오름 중에서 가장 가성비가 좋다. 길지 않은 시간에 이런 탁 트인 경치를 볼 수 있다니...  루피도 상쾌한지 바람을 맞으며 입꼬리를 올리고 혀를 길게 빼고는 웃는 표정을 짓는다.


피아노도 한마디 한마디 천천히 급하지 않게 연습하다 보면 악보의 마지막장, 마지막 마디를 치는 날이 분명 오겠지. 그러면 나도 오름 정상에 오른 루피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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