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을 좋아한다. 그 사실을 한동안 숨기고 살았었다. 애가 둘이나 되는 어른이 철없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처럼 빨강머리 앤을 좋아하는 어른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MBTI 가 유행하기 시작하고 재미 삼아 한 번 검사를 해 봤는데 INFP가 나왔다. 자세한 설명은 잘 읽지도 않고 INFP에 해당하는 사람들 목록에서 빨강머리 앤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어쩐지... 앤이 하는 말에 그렇게까지 공감이 되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독서 모임 때문에 <빨강머리 앤>을 다시 읽고 있는데 앤에게서 인프피의 성향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우리의 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로맨틱’과 ‘상상’이다. 상상을 너무 많이 한다며 자책하기도 하지만 친구들과 이야기 클럽을 만들어서 글쓰기 연습을 하는 앤을 보는데 잘팔작프(잘 팔리는 작가 되기 프로젝트)라는 조금은 허황된 이름을 하에 줄기차게 글을 쓰는 우리들의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피식 웃음이 났다.
빨강머리 앤 만큼이나 사랑해 마지않는 박완서 작가는 자전적 소설 <그 남자네 집>에서 끊임없이 음식을 만들고 먹기를 반복하는 시집의 식도락에 절망감을 느낀다며 ‘딴생각’을 하는 게 자신에게 더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 ‘딴생각’이 전업주부로 살다 마흔이 되어서야 소설가가 된 그녀에겐 지금 있는 세상에서 딴 세상으로 넘어가도록 해 준 ‘키’ 역할을 해준 것이다.
전업주부로 살아오면서 딴생각을 많이 하던 내게도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다. 2019년 봄, 가끔씩 눈팅을 하던 자기 계발 인터넷 카페에 한 소모임 공지가 올라왔다. 낯선 사람들과 만나 글을 쓴다는 게 영 내키질 않았지만 자꾸만 관심이 갔다. 뭔가를 하겠다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듯한 모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난, 며칠을 망설였다. 낯선 사람들하고 하는 것도 싫었지만, 무엇보다 출결관리가 엄격한 영어학원을 다니고 있어서 중간에 조퇴를 해야 한다는 것도 고민이었다. 첫 모임이 있던 날, 영어학원에서 2교시까지 고민을 하다가 교무실로 가서 조퇴 신청을 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글쓰기가 처음이라 흥미롭긴 했지만 낯선 사람들과 몇 시간 있다오니 온몸에 기가 빨리는 것 같았다. 다행히 오프라인 모임은 한 달에 한 번이었고 매일매일 글을 써서 카톡방에 올리면 된다고 했다. 나는 그저 리더가 하라는 대로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가끔씩 키워드를 주면 거기에 맞는 글을 쓰기도 했다. 단 몇 줄을 쓰는 것도 어려웠지만 왠지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꾸역꾸역 매일 글쓰기를 했다. 한 어느 정도 멤버가 꾸려져서 8~9명 정도가 함께 글을 썼는데 오프라인 모임에 갈 때마다 낯선 사람들 틈에서 '가장 말이 없는 사람'으로 앉아있다 돌아오곤 했다. 물론 하라는 건 열심히 했지만.
서툰 글이라도 매일 쓰는 건 좋았지만,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내키지 않았다. 당시 난 제주 이주 4년 차였다. 함께 집을 지어 이사를 와서 가족처럼 의지하던 단 하나의 이웃이자 친구였던 옆집 식구들이 이주 3년 차를 견디지 못하고 갑작스레 다시 육지로 떠나고 혼자 지내던 때였다. 내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때이기도 했다. 난 자연스러운 기회를 만들어 육지도 다시 떠날 생각만 하고 있었고 그래서 제주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한 달에 한 번 모임에 갈 때마다 거기 사람들에게 왠지 마음이 갔다. 마음을 주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난 그들에게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글쓰기 모임 외에 책 읽기 모임도 하고 미술관도 가고 하다가 그 해 가을엔 아예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놀자는 취지로 네이버 카페까지 만들었다. 그 카페가 이젠 제주에서 자기 계발카페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성소사'이다. 잘 팔작프 모임을 함께 하며 글동무이자 언니동생으로 서로 의지하고 있는 시온이와 니콜도 다 그 시기에 처음 만난 인연들이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내가 그날, 영어학원 조퇴를 안 하고 끝까지 학원에 있었다면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나름 열심히 살고 있긴 하겠지만, 제주에 아직 남아 있을 리도 없고, 글 같은 건 쓸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빨강머리 앤을 읽으며 앤의 언어에 상상력에 그토록 공감이 되고, 롤모델인 박완서 작가의 책을 읽다 '딴생각'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머물렀던 건, 전업주부로 살면서 나 역시 끊임없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딴생각을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었을 거다. 상상 속에만 있던 딴생각은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일관성 있게 진화해 갔다. 그저 호기심에 문을 두드렸던 그 작은 글쓰기 모임이 나를 참 많이도 바꾸어놓았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난, 어쩌면 영원히 '딴 세상'으로 가는 통로로 들어서게 되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