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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경 Jun 14. 2024

팔자

미움이 내 팔자를 완전히 바꾸기 전에

나의 선택이 아닌 것들로 인해 참 많은 대가를 치렀다. 특권이라고 여겨지는 다양한 모습들은 알고 보면 결국 다른 이들보다 나음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아닐까 생각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으로 충족하고 시시때때로 기분이 상하면 드러내는 삐뚤어진 심성을 마치 논리인 척 포장하는 그 오만을 극복해야 하는 사람은 불공평하게도 무시당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비겁하기 그지없고 다른 이를 밟고 올라서는 비열함까지 더해지면 경멸은 저절로 생겨난다. 자신의 행동이 미치는 영향력을 즐기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월은 뽐내고 싶으면서도 얄팍한 내면은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시당한다는 느낌이 조금이라도 들면 발끈한다. 내면이 텅텅 빈 걸 감추느라 의식 있는 척 포장하는 껍데기는 요란하다. 그 수선이 너무나도 피곤했다. 그래서오랫동안 나는 미간에 힘을 주고 살았다. 누구나 표정만 보면 알 수 있게 인상을 있는 대로 한껏 구기면 이마에 팔자가 생긴다. 그 팔자가 나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경계선이 되었다. 그렇게 아주 긴 시간 내 팔자는 서서히 깊어져 갔고 미움의 골이 패었다.

애써 감추어도 들통나기 마련인 모습들을 다르게 이해하기 시작한 건 그들이 바뀌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여전히 빈 깡통처럼 출렁댄다. 바깥세상에 있는 그들을 내 안으로 끌고 들어와 미련하게도 팔자를 바꿔간 건 나였다.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 늙고 병들고 나약해지는 모습들이 드러나자 그들이 아니라 미워하던 나에게 주름을 훈장처럼 고약하게 달아 놓았다. 그들을 향했던 미움이 나를 망가뜨렸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미워해서 뭐 하겠다고 번번이 꼴 보기 싫은 감정을 추스르느라 애를 썼을까.  내 팔자가 꼴 보기 싫었다. 품위 있고 우아하게 살 선택권이 있었지만 그 선택을 버리고 미움을 가져간 건 나였다. 난 그들이 싫고 밉지만 잘게 부수어 나누기 시작 했다. 트레이에 담는 양념처럼 말이다.

가장 매운 청양고추를 다진다. 매운 내가 코를 확 찌르자 눈물이 난다. 콧물까지 흐르고 피부에도 여기저기 닿아 벌겋게 부풀어 오르고 따끔따끔하다. 연례행사처럼 실리콘 트레이에 잘게 다져진 청양고추를 조금씩 담아 냉동고에 보관한다. 이렇게 하면 하나부터 몇 개씩 단계별로 맵기를 조절할 수 있다. 맵기는 다른 맛과 희석되면 순해지지만 뭉치면 대단히 강력해진다. 얼마 전 캡사이신을 먹고 죽은 사람이 있다는 기사가 날 정도니까. 다행이다. 나는 미움이 캡사이신까지 뭉치기 전에 멈췄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나누어 저 안 깊숙이 넣어 두었다가 한 번씩 툭툭 꺼낸다. 청양고추를 요리에 넣어  맛을 내듯 잘게 다져놓은 미움을 행복과 즐거움과 사랑에 섞어 희석한다. 적당히 자극하다 사라지는 매운맛처럼 적당히 그 미움도 내 삶을 자극하고 이내 사라진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이마에 힘을 풀어 팔자를 펴려던 것이 지금은 꽤나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제 나는 인상을 쓰지 않는다. 이마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많이 옅어진 팔자 주름이 신기를 확인한다. 미움이 옅어질소록 주름이 펴지고 내 팔자도 피고 있다. 팔자 소관은 어쩔 수 없다손 쳐도 그 후의 내 선택은 그 팔자 소관마저 바꿀 수 있다.


솔체꽃은 꽃말은 슬프지만 결혼식 부케로 많이 쓰인다고 한다. 그만큼 예쁘기 때문인 것 같다. 솔체꽃잎은 모양이 복잡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하나하나 가느다란 꽃술이 보인다. 인생도 그런 것 같다. 복잡하고 답이 없다 여겼지만 찬찬히 들여다 보면 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적어도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알면 그 다음은 쉬워진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처럼 인생은 나에게 아프고 고달픈 시간을 견디라 했건만 그 시간을 견디는 방법을 너무도 몰랐다. 허비한 시간들은 고스란히 내게 업으로 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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